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3(월산~서광)
 김승태
 2010-06-10 21:32:35  |   조회: 5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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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제주는 축제의 계절이라 일컬을 만하다. 3월 26일부터 3일 간 제주시민복지타운에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시작으로 4월 1일부터 5일까지 서귀포시 가파도에서의 제2회 가파도청보리축제가 이어진다. 한편, 3월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 1천200t급 초계함(哨戒艦) ‘천안함’이 침몰되었는데(승조원 104명 중 46명 실종) 29일 현재까지 사고 원인은 물론 구조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서귀포시를 관통하는 중산간도로(1136번)는 회수마을에서 상창사거리로 연하는 국도대체우회도로가 개설(1997. 12. 30.~2002. 06. 19.)되면서 중문교(橋)에서 갈려 나간다. 이 도로는 색달동을 지나 일주도로(1132번)변 색달 입구에서 일주도로와 만나 창천삼거리까지(3.3km)는 겹쳐지다가 창천삼거리를 기점으로 일주도로는 화순 쪽으로 이어지고 중산간도로는 다시 상창사거리까지(2.3km)는 한창로(1116번)와 겹쳐졌다가 상창사거리에서 갈려 한창로는 동광리 쪽으로, 중산간도로는 서광동리 쪽으로 갈려진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3’의 제5일째인 3월 28일 08:00 한라체육관 주차장에 모여 출발지인 월산마을 정류소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다. 월산마을 정류소에서 출발하여 서광서리교차로까지는 5시간 29분(점심 포함)이 소요되었으며 주거리 21.3km, 보조거리 0.6km를 포함해 모두 21.9km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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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마을정류소(08:56) -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09:00) - 용흥동입구(09:03) - 활오름입구(09:08) - 녹나무자생지(09:15) - 탐라왕자묘입구(09:29) - 법화사(09:50) - 개오름입구(10:18) - 회수사거리(10:25) - 중문교(橋)(10:51) - 색달중앙로(11:24) - 색달동입구/1136*1132교차점(11:35) - 상예2동입구(11:56) - 군뫼입구(12:04) - 창천교(橋)/창천삼거리(12:14) - 상창리복지회관(12:27) - 상창교차로/점심(12:39)- 세계자동차박물관(13:36) - 서광동리/서광초(13:55) - 서광1교차로(14:03) - 서광서리(14:25)

-- 주요 역사의 현장
0 용흥동:이 마을은 옛날 강정2구였는데 4․3 때 강정리로 소개했다가 진압 후인 1952년 인근의 작은 자연부락들인 천외동, 염둔동, 월산동, 기목동, 궁산동, 엉커리 등의 이재민들을 포함, <복용동산> 뒤에 재건하였다. 그 이전의 설촌은 지금으로부터 360여 년 전 파평 윤씨 12대 후손인 시번이라 알려지고 있다. 1928년께는 마을 이름을 신흥리(新興里)라 부른 적도 있었다. 설촌 이후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쪽에 천년송(千年松), 남쪽에 만년(萬年) 팽나무를 심어 마을을 지켜왔으나 현재는 팽나무만이 남아 있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활오름:오름의 모양새가 활처럼 생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한자로 ‘궁산(弓山)’이라고 했었다. 이 오름은 강창학 씨 소유로 알려져 있는데 오름 전체가 조경수로 가득 차 있어 계절에 따라 즐길 수 있다. 정상에서는 한라산과 서귀포시 서부 지역을 조망할 수 있음

0 개오름:오름의 모양새가 마치 개가 몸을 구부리고 있는 모양, 또는 개가 노루를 잡으려고 뛰어 오다가 앞에 범(범섬)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곳에 주저앉았다는 형국설에 따라 개오름, 예전에 이 오름에 봉수가 있었음에 연유하여 망동산, 구산봉(狗山峰), 구산망(狗山望)이라 하고 있음

0 회수동:한라산을 병풍처럼 펼쳐 놓은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중문동 6통에 해당한다. 조선 정조 때 대포리 거주 이씨가 처음 들어온 후 50여 세대가 추가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물에 대한 갈망으로 마을 이름을 <도래물>이라 칭하였다고 함 - 걸어서 제주 속으로 2(1100도로편 참조)

0 색달동:색달동의 옛 이름은 <막은다리> 또는 <막은골>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 색달(塞達)이라 하다가 나중에 한자가 색달(穡達)로 바뀌었다. 1981년 색달리에서 색달동으로 지명이 변경되었으며 상예동, 하예동과 더불어 행정동인 예래동이 관할하는 동이 되었다. 색달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때 원나라 군사를 내쫒고 국권을 회복하여 1374년 제주에 14현촌을 설치할 당시 예래현이 있었으므로 이때 이미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참조:두산백과사전

0 예례동:1915년 도제 실시(島制實施)에 따라 서귀는 제주도 우면, 중문은 좌면이 되었다가 1935년에 서귀면과 중문면으로 개칭하였다. 1946년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이 신설됨에 따라 남제주군 서귀면, 남제주군 중문면이 되었다. 1956년에 서귀면이 서귀읍(西歸邑)으로 승격하고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을 통합하여 서귀포시(市)가 됨으로써 색달리(里), 상예리, 하예리가 색달동(洞), 상예동, 하예동으로 바뀌었고, 행정동으로 예래동을 설치하였다. 행정동인 예래동은 법정동인 색달동, 상예동, 하예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참조 : 두산백과사전

0 창천리:예전에는 <포시남마루>라 하여 10여 가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인데 1674년(현종 15년)에 대정현 상모리에 거주하던 강위빙(姜渭聘)이 설촌하면서 내(川)에 창고처럼 생긴 암굴이 있다 하여 <창고천리>라 불렸다고 전해온다. 1914년 일제 강점시에 토지세부측량이 실시되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천리로 바꿔 부른 게 오늘에 이른다. - 참조:마을홈페이지

0 상창리:구전에 의하면 약 150년 전에 이 마을에 들른 한 풍수사가 이 곳에 있는 연못을 보고 그 형태가 마치 거북이 모양과 같다고 한데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 전체가 암반으로 덮혀 있는데 마치 거북이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하다. 본디 연못이 세 개나 있어 <웃성구못․동성구못․서성구못 >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 마을은 본디 창천리와 한 마을로<웃창고내>라고 했는데 서기 1900년에 <하창리> 즉 창천리와 상창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1년도에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었다. - 참조:마을홈페이지

0 서광동/서리:밝은오름(明岳)의 토질이 적토인데 이 마을이 바로 그 오름 기슭에 자리 잡음에 연유한 이름이 <자단리>이다. 이 마을은 사계리, 덕수리, 서광동․서리, 상천리등을 포함한 대단히 큰 마을이었으나 1830년대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제각각 분리되었다. 이후 이 일대의 중산간 마을을 합쳐 <광청리>라 했는데 사방이 탁 트여 아주 멀리 훤하게 보일뿐 아니라 청정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4. 3사건으로 인해 폐동되었다가 1950년경에 복구, 재건되면서 마을이 둘로 분리되어 이 지역은 서광리로 불리워지다가 1962년에 다시 서광서리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 참조:마을홈페이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法頂, 1932∼2010년) 스님이 지난 3월 1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정 스님의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겠다.”는 유언으로 서점가에서 ‘무소유’ 품귀 현상이 빚어진 가운데 ‘무소유’ 중고책 한 권의 경매가가 21억 원까지 치솟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무소유’를 외친 법정 스님의 뜻이 무색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현실은 주위를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

법화사를 견학하고 나서 ‘사는 게 무얼까?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한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법정 스님은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주고 떠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찰나’가 바로 인생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불교에서는 ‘한 조각 뜬구름’이라고 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그 만큼 덧없고 허무한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대중가수가 부른 다음의 노랫말에는 삶을 잘 담아낸 것 같다. “살다보면 알게 돼 일러 주지 않아도 / 너나 나나 모두다 / 어리석다는 것을 /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 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 살다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2010. 03. 29.)
2010-06-10 21: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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