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3(동명~광령)
 김승태
 2010-07-11 12:05:33  |   조회: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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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제주에 비가 많이 내리긴 내린 모양이다. 조선일보(2010. 04. 13.)는 '봄철 백록담, 보기 드문 만수위'란 제하로, "한라산 정상에 있는 호수인 백록담에 물이 가득 찼다. 봄철에 백록담이 만수위(滿水位)를 보인 것은 드문 일이다. 12일 제주도 한라산국립공원보호관리부에 따르면 해발 1950m인 한라산 정상 일대에 지난달 30일 219㎜의 비가 내린 것을 비롯해 이날 오전까지 모두 400여㎜의 비가 내리며 백록담이 물로 가득 차 등산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백록담의 만수위는 4m인데 현재의 수위는 3m를 넘어 봄철로는 드물게 만수위에 근접했다."라고 보도하면서 "한라산의 분화구는 표고가 1841.7m, 둘레 1720m, 깊이 108m, 길이는 동-서 약 600m / 남-북 약 400m, 전체 면적은 21만230㎡"라고 덧붙였다.

3월의 꽃샘 추위는 4월 중순까지 봄 추위로 이어지면서 14일에는 한라산에 5cm의 봄눈이 내렸으며, 광주구장에서는 내린 눈으로 인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정규 시즌 경기(두산 : KIA)가 취소되는 초유의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제8일째인 4월 18일, 걷기에는 최적의 날씨였으며 시계 또한 무한대였다. 출발지인 한림읍 동명사거리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으며 목적지인 무수천사가로까지 5시간 27분이 소요되었다. 주거리 20.5km, 보조거리 1.0km를 포함해 모두 21.5km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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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동명사거리(08:45) - 상대리마을회관(09:12) - 귀덕3리사거리(09:27) - 한림읍*애월읍경계(09:34) - 봉성리/도노미오름입구(09:58) - 납읍리(10:34) - 상가리(11:04) - 하가리입구(11:08) - 우사지(11:35) - 용흥리(11:41) - 장전리마을회관/장전초/점심(12:06) - 장수물(13:12) - 구시물(13:24) - 항파두리입구/항몽유적지(13:28) - 고성1리마을회관(13:33) - 광령리/광령초(13:57) - 무수천사가로(14:12)

-- 주요 역사의 현장
0 상대리 : 1630년대에 <종구실>에 정착한 인동 장씨에 의해 설촌되었다. 이로 인해 종구실 장씨라는 계파를 이루었고 더러는 협재(挾才)와 곽지(郭支)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소귀리(召貴里), 대촌리(大村里)로 불리운 적도 있었으며 마을이 커지자 세마을로 나뉘었는데 현재의 대림리인 중대(中大)와 한림리인 하대(下大)가 그 마을들이며 상대만 현 상태로 남아있다. 4·3사건 이전에는 무려 14개 동네가 흩어져 있었으나 거의가 폐동되고 그 후에 종구실, 못거리, 하동 등으로 합쳐져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귀덕3리 : 고려 시대에 형성되어 1820년대에 마흘동(馬屹洞)과 다교동(多橋洞)을 합하여 신흥동(新興洞)으로 개칭된 이후 일제 시대에서는 귀덕4구(歸德四區)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 또 다시 신흥동으로, 1970년 12월 1개의 里로 인정받아 신흥리(新興里)로, 1997년 5월부터 귀덕3리로 불리고 있다. 어도봉 대간(大幹)이 대덕용(大德龍)으로 돌아온 곳이라 하여 귀덕(歸德)이라 칭했다는 설이 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봉성리 : 1600년(선조 33년)에 설촌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의하면 최초의 리명은 어음비도내산리로 부르다가 도내산리로 개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1구, 2구로 분리되어 1구는 동개동, 서성동, 중화동, 구몰동, 화전동 등 5개의 자연마을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2구는 자이동, 고도동, 마전동, 상시동, 마당이동, 금천동 등이었다. 4·3사건으로 각지로 분산 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다.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어도오름의 밑이 되므로 도래미·도래메·되레미어두어 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어도리로 칭하다가 1993년 4월 봉성리로 변경하였다. 한편, 속칭 <지세나못>이 있는 구몰동은 목과 지형지세가 거북이가 진흙에 빠진 형이라 하여 구몰니동이라 부르다가 구몰동으로 칭한다고 한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도노미오름 : 도(길목, 어귀, 입구의 제주어)+노(넘+이)+미(뫼, 산)로 분석하여 길목을 넘는 산, 마을 이름이 오름에 전이되어 어도오름, 이를 한자로 도내악(道內岳), 도내망(道內望), 어도악(於道岳)이라 표기하고 있음

0 납읍리 : 옛 이름은 과납 또는 납이다. 과납이라는 이름은 문서상 이외에는 거의 통용되는 이름으로, 과오름 남쪽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납읍(納邑)은 1675년(숙종 1년)에 자연 지세가 여러 마을이 모여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읍과 같고, 납(納)자는 입주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최초의 거주는 1300년 경(고려 충렬왕)에 시작되어 점차 마을 형태를 이루었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곽오름 남쪽이 되므로 곽남 또는 과납이라 하다가 납읍으로 고쳤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납읍리가 되었다. - 참조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0 상가리 : 옛 이름은 웃더럭이다. 가락은 더럭의 한자 차용 표기인데 가(加)는 더의 훈가차 표기, 락(樂)은 럭의 음가차 표기이다. 더럭은 고유어로 보이는데 그 뜻은 확실하지 않다. 고려 충렬왕 때 거주가 시작되었으며, 1300년(충렬왕 26년)에 고내현 가락촌이 되었다. 1444년(세종 26년)에 도내 목장 지대 6개소에 간이역 설치로 가락촌에 간이역 동네가 생기고, 호구가 증가하여 상가락, 하가락으로 분리되었다. 1874년(고종 11년)에는 신우면 상가리가 되었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더럭 위쪽이 되므로 웃더덕, 웃가락 또는 상더럭, 상가락, 상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상가리가 되었다. - 참조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0 하가리 : 고려시대부터 화전민이 모여 살다가 1418년(태종18년) 현촌 고내리에서 분리되어 가락리로 불리우다 1448년(세종30년)에 판관 하담의 일설에 의하면 윗동네를 상가락, 아랫동네를 하가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798년(정조22년) 판관 김계보 재임시 상가락을 상가리로 하가락을 하가리로 개칭하였다. 지금 '더럭'으로 부르게 된것을 '더할 가'자의 '더'자와 '즐거울 락'자의 '락'자가 합하여 우리말로 '더럭'으로 부르다가 음운의 변천과정에서 '더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용흥리 : 700여년 전에 설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동쪽의 용마루동산(龍旨), 제한이동산으로 맥을 이루어 사방의 소나무군으로 형성되어 있어 송냉이(松浪伊)라 칭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신엄리에 합병되어 신엄3구로 불리다가 1952년에 신엄리에서 분리하여 용마루(龍旨)동산의 정기를 상징하여 지명을 용흥리(龍興里)로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눈오름 : 오름의 모양새가 소가 머리를 들어 누어있는 형체를 하고 있어 누운+오름, 이의 축약으로 눈오름, 논오름, 이를 한자 노은봉(老恩峰)이라 표기하고 있음

0 장전리 : 옛 이름은 진밧 또는 장밧이다. 긴 밭이라는 뜻으로 장전(長田)은 한자 차용 표기이다. 진밧은 김통정 장군이 대몽항쟁 당시 장전 일대를 군사훈련 장소의 책임자에게 지급한 토지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대몽항쟁 군사들과 제주 사람들이 촌락 형태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1948년 4·3사건 때 정부 소개령으로 가옥이 전소되었으나, 1949년 마을을 재건하였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사장 터에 밭을 만들었으므로 사장밭, 장밭 또는 장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장전리가 되었다. - 참조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0 고성리 : 옛 이름은 항바두리 또는 옛성모을이다. 항의 가장자리와 같이 항바두리 토성이 타원형으로 쌓아져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고성(古城)은 항바두리 옛성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1271년(원종 12년)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우면의 한 촌락으로 존재하다가, 1884년(고종 21년)에 독립된 마을로 고성리라 불렀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항파두리, 고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고성리가 되었다. 1998년부터 양잠단지가 고성 2리로 분리됨에 따라 고성 1리가 되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

0 광령리 : 옛 이름은 광령이며, 광령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예로부터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산주수청하니 광이요, 백성의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령)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속칭이 전혀 없이 한 가지 이름으로만 불려 온 특징을 갖는다. 본래 제주군 애월면 지역으로 광령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광령리가 되었고, 1963년 12월 광령1리, 광령2리, 광령3리로 나뉘었다. - 참조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글에선,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 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쳐가면서 '남은 인생살이를 걱정하고,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감이 보람된 일일까?' 등을 부지불식 간에 헤아리게 됨은 나이 들어감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이 어쩌면 나의 삶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어진 일에 늘 감사하며, '나홀로 인생'이 아닌 '더불어 함께 하는 품앗이 인생'을 살아가기로 다짐도 해 보았다. 중산간도로를 따라 거니는 '걸어서 제주 속으로 3'도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2010. 04. 18.)
2010-07-11 12: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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