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5 - 남조로(남원교차로~제주목장 입구)
 김승태
 2011-04-03 17:11:34  |   조회: 7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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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의 폭설과 한파는 우리 나라의 기상 관련 기록들을 대부분 갈아치웠다. 특히, 동해안 지역은 40년 만의 한파와 건조, 기상 관측 이래 100년 만의 폭설이었다고 한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라 지난해 12월부터 2월까지 제주섬을 꽁꽁 얼어붙게 한 추위는 제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3월 초순의 꽃샘추위 또한 맹위를 떨쳐 생활에 큰 불편을 주었다.

꽃샘추위가 물러나면서 날씨는 포근해졌다. 보도에 의하면, 봄의 전령사 매화꽃이 피어나면서 제주의 봄 관광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한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5'의 비자림로에 이은 남조로 제1일째인 3월 13일은 올해 들어 가장 따뜻한 날이었다.

남조로(제1118호선)는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 201-1번지에서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47-3번지까지 이어지는 길이 32.1km의 도로이다. 남원의 머리글자 '남'과 조천의 머리글자 '조'를 따서 남조로라고 칭하였다. 디지털문화대전에서는, "이 도로는 1980년대 초반부터 기존 서부산업도로(평화로)와 동부산업도로(번영로) 확장, 포장과 함께 제주시 조천읍과 구좌읍 지역, 그리고 구 남제주군 남원 지역간의 접근도 향상을 위한 새로운 도로 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특정지역 제주도 종합개발계획’ 용역 수립 과정에서 남원읍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탄원에 따라 남조로 개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7년 당시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은 각각 남조로 개설 공사에 착수, 북제주군은 조천~교래 구간을, 남제주군은 남원~교래구간 도로 공사에 들어갔다. 남제주군은 착공 2년만인 1989년에 공사를 완료했으나 북제주군은 1993년에야 완공하였다. 공사 당시 남조로 구간 중 일부인 남원읍에서 수망리까지 기존 도로 포장이 이루어져 있음에 따라 당시 남제주군 관내 공사 구간은 9.3㎞에 불과 했지만 북제주군 구간은 15.457㎞에 달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발지인 남원교차로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했고, 제주목장 입구까지는 4시간 04분(간식 포함)이 소요되었다. 주거리 15.9km, 보조거리 0.2km를 포함해 모두 16.1km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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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교차로(09:00)~의귀사거리/의귀초등학교(09:39)~수망사거리(10:30)~수망교차로(10:54)~수망리 왕벚나무 자생지(11:15)~수망관광지구 입구/부영CC 입구(11:28)~남원충혼묘지 입구/물영아리 탐방안내소(11:35)~THE CLASSIC 입구(11:52)~사려니숲길 입구/붉은오름 입구(12:36)~서귀포시*제주시 경계(12:56)~제주목장 입구(13:04)

--- 주요 역사의 현장

0 남원교차로 : 남조로와 일주도로(1132번)가 만나는 곳이다. 남조로 개설 당시에는 남원리201-1번지(남원리 사거리)가 출발점이었으나 남원리 중심가를 우회하는 일주도로가 개설되면서는 남원교차로가 기점이 되며 원래보다 500m가 줄어들었음

0 의귀리 : 1600년(선조 33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 김씨 만일이 국난의 어려움을 인식하여 병마 500필, 1659년 이후 그의 아들 대길이 매년 500여 필의 병마를 조정에 헌납했고 1724년 제주에 기근이 드니 대길의 손자 남헌이 비축미 1,340석을 풀어 구휼하니 그 공을 찬양하여 1752년 영조왕이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이에 임금이 하사한 옷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94∼1926년까지 서중면의 소재지로서 행정, 산업,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일제에 의해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수망리」와 <동의리 > 일부를 병합하여 「의귀리」라고 이름짓고 제주군에 편입되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

0 넉시오름 : 오름의 형국이 넋 나간 소가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넉시오름(넋이오름), 넉시악, 이를 한자로 대역하여 魄(넋 백)+ 犁(얼룩소 리)+岳이라고도 하고 있음('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 소개)

0 의귀초등학교 : 1941년 6월 남원공립국민학교 병설 의귀간이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943년 3월 남원북국민학교로 승격 및 교명 변경하였다. 1945년 9월 의귀국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8년 12월 4.3사건으로 폐교되었다. 1949년 8월 남원국민학교 의귀분교장 인가를 받고 1949년 11월 설립되었다. 1959년 2월 의귀국민학교로 독립하여 개교하였다. 남원읍 의귀리 1483-3번지에 있음('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

0 수망리 : 수망리는 예전에 '물우라. 무라'라 칭했는데 이는 약 550여 년 전에 설촌할 당시 이 마을의 높은 곳에 물이 있다 하여 연유한 이름이다. 높은 곳에 물이 있다함은 「물영아리」즉「수영악」의 분화구를 두고 한 말이다. 서기 1915년 일제 강점기에 도사제(島司制)를 실시하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이 때「수망리」로 마을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바꾼 연유가, 마을이 높은 지대에 자리잡으니 전망이 좋다는 뜻에서, 또 다른 설은 「물영아리」의 용줄기를 타고 설촌 되었다는 풍수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

0 수망교차로 : 남조로와 서성로(1119번)가 만나는 곳으로 주위에 수망관광지구가 있음

0 수망관광지구 : 2000년 3월, (주)우방리조트가 남원읍 수망리 산 1번지 일대 2.391㎢(723천평)에 3,040억 원(민자)을 투자해 관광호텔, 콘도미니엄, 관광농장, 골프장 시설 등의 사업 승인을 받고 2001년 12월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 2008년 3월에 1단계로 골프장 27홀(회원제 18홀, 퍼블릭 9홀)을 준공하였음

0 남원충혼묘지 : 1955년 12월, 당시 남원면(면장 강순극)에 의해 조성된 묘역을 1991년 2월 26일에 남제주군(군수 李君先)에 의해 현 위치에 이설하여 단장을 하고 충혼탑도 세웠음

0 물영아리 : 물(水)+영(靈)+아리(만주어로 山)로 분석되어 물이 고여 있는 신령스런 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00년 12월에 전국 최초로 습지 보호 지역(30만 9,244㎡)으로 지정되면서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오름이다. 이 습지는 2006년 10월에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람사르조약' 습지로 등록된 후 탐방객들이 급증하자 관계 당국에서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부에 출입 금지를 신청했고, 2004년 7월부터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었다. 이후 관계 당국에서는 기슭에서 굼부리까지 목책 시설물(88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해 놓았으며, 굼부리에는 습지 이해를 위한 안내문(동, 식물)과 전망대 등의 이용 시설물을 완료시켜 개방해도 습지 생태계에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2007년 7월 20일부터 개방하고 있음

0 쳇망오름 : 오름의 모양새가 체(굵은 알갱이를 걸리게 하고 가루나 액체를 빠져나가게 하는 촘촘한 그물이나 철망이 바닥에 달린 원통 모양의 도구)의 망처럼 생겼다 하여 쳇망오름, 표선면 가시리의 가시천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하여 천망악(川望岳)이라 붙여졌다고도 함

0 붉은오름 : 이 오름의 흙이 유독 붉은빛을 띠고 있어서 붉은오름, 이를 한자로 적악(赤岳)이라 하고 있다. 남쪽 기슭에는 사려니숲길 시발점이 되고, 북쪽 기슭에는 2008년 5월에 서귀포시에 의해 190ha 규모 부지에 야영장, 생태원, 산림 휴양관, 숲속의 집 등의 편익시설을 비롯 다목적구장, 건강 지압로, 산책로, 등산로, 자전거길 등을 갖춘 생태 체험장이 조성되고 있음

0 제주목장 : 한국마사회가 설립한 대한민국의 경주마목장이다. 65만여 평의 부지에 마사, 초지, 의료시설을 갖추고 국내 마필생산과 육성을 담당하고 있다. 교배지역, 육성지역, 놀이지역 등 3개 지역으로 나눠져 있으며 육성마사와 실내원형마장, 워킹머신 등의 육성조교시설이 갖춰져 있다. 놀이지역 내에는 물레방아와 벽천폭포, 분수대, 말을 테마로 한 조각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 위키백과에서 가려 뽑음 -

지난 11일에 발생한 규모 9.0의 대지진과 쓰나미는 일본 열도를 강타했다. 이번 강진으로 최대 피해 지역 중 하나인 미야기(宮城)현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만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직격탄을 맞은 일본은 산업이 휘청거리고 있으며, 이 여파로 우리 나라 경제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고 한다.

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후 매스컴을 통해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는 가운데 일본인들의 높은 질서 의식과 침착성, 그리고 남을 위하는 배려와 신뢰 등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만약에 ‘이와 유사한 상황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모습이 벌어지고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2011. 03. 13.)
2011-04-03 17: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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