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5 - 한창로(동명사거리~창천삼거리)
 김승태
 2011-04-22 12:13:13  |   조회: 6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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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으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올해로 63주년, 제주4.3평화공원에서는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평화로운 미래를’이라는 주제의 위령제가 열렸다. 제주4.3을 치유하는 길은 무엇일까?

한창로를 걷는 4월 3일, 4.3 영령들의 아픔을 대신이라도 하듯 다소 차가운 봄비가 새벽부터 내려 걷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출발함에 고민도 있었지만 '오르미의 기적'을 믿고 강행하기로 했다. 참가자들은 모임 장소인 한라체육관 주차장에서 만나 교통편을 논의하고 중간 도착지인 동광육거리에 차 1대를 두고서 출발지인 동명사거리에 가서 한창로 기점을 확인했다.

한창로(제1116호선)는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121번지에서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155-13번지까지 이어지는 길이 21.2㎞의 도로로서 한림의 머리글자의 한자와 창천의 머리글자 창자를 따서 한창로라고 칭하였는데 목장 지역을 연결한다고 하여 서부축산도로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군용도로, 6.25 이후에는 축산도로, 지금은 산업 관광도로의 다목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도로 개설 당시의 기점은 한림리 121번지(한림항 부근)였으나 이후 한림리를 지나는 일주도로(1132번)가 마을을 우회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는 동명사거리가 되며 원래보다 0.9km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동명교차로에서 금악삼거리까지 4.5km, 상창교차로에서 창천삼거리까지 2.3km는 중산간도로(1136번)와 중용되고 있다.

이 도로는 1971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금악리에 조성된 이시돌목장을 방문, 맥그리치 신부로부터 이시돌목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가던 중 차가 도랑에 빠지면서 도로 확, 포장을 지시해 포장 사업을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 이도로는 1971년 1차 확, 포장 당시에 금악주민들이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고 인력까지 제공하였다. 그 뒤 두 차례에 걸친 확, 포장 공사 때에도 도로에 편입된 토지는 물론 무상으로 주민들이 도로 개설에 참여하였다. 1973년에는 한림에서 이시돌 목장 간 10㎞를 포장하였다. 1979년 4월 29일에는 제주도 고시 제123호에 의거, 지방도로 지정되었다. 1989년에는 이시돌목장에서 창천 사이까지 완전 포장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발지인 동명사거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걷는 데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었고 5분 정도 지나면서는 비도 그쳐 걷기에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주거리 19.3km, 보조거리0.1km를 포함해 모두 19.4km였으며 5시간 9분(점심 및 간식 포함)이 소요되었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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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사거리(09:06)~동명교차로(09:27)~동명리 문수동(09:33)~명월리 고림동/갯거리오름 입구(09:55)~명월삼거리(10:08)~금악삼거리(10:30)~금악리복지회관(10:36)~금오름 입구(10:53)~성이시돌센터 입구/제2산록도로 분기점(11:09)~정물알오름 입구(11:20)~블랙스톤 입구/도너리오름 입구(11:25)~동광육거리(12:05)/점심(13:00)~밝은오름 입구(13:11)~TEDDY VALLEY 입구(13:28)~ 상창교차로(13:44)~상창리복지회관(14:02)~창천삼거리(14:15)/창고천 답사

--- 주요 역사의 현장

0 동명사거리 : 한창로와 일주도로(1132번)가 만나는 곳으로 한창로의 실제 기점이 됨

0 동명교차로 : 한창로와 중산간도로(1136번)가 만나는 곳으로 한창로는 여기서부터 금악삼거리까지 중산간도로와 중용됨

0 명월리 : 쌍계수가 항상 흐르므로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렸다. 1300년(충렬왕 26년)에 제주에 동, 서현을 설치하면서 이 마을의 산세가 좋으므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리라 하여 마을 이름을 청풍명월의 뜻인 명월(明月)이라 했다. 일설에는 마을의 형태가 반달과 비슷하다 해서 명월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명월리는 웃명월(명월리의 윗쪽에 있다는 뜻으로) 동명월 (명월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으로) 서명월 등으로 나누어 졌는데 웃명월은 현재의 상명리, 서명월은 명월리, 동명월은 동명리로 분리되었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함)

0 금악리 : 1550년 경에 상명리에 진주 강씨 일가가 이주하여 동네 북쪽을 차지하고 남쪽에는 남양 홍씨가 차지하여 설촌한 것으로 전해온다. 설촌 당시에는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리워 오다가 이 마을에 있는 오름의 모습이 거문고를 타는 여자형인 데서 1623년께 금물악(琴勿岳)이라 해서 수류촌에서 분리했다. 그 후 琴岳으로 표기해 오다가 지금부터 150여년 전쯤에 今岳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 참조 : 마을 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함)

0 금오름 : 고조선 시대부터 쓰여 온 신(神)이란 뜻의 금(검․감․곰)+오름, 이를 한자로 금악(今岳)이라 하고 있음

0 성이시돌센터 입구 : 한창로와 제2산록도로(1115번)가 만나는 곳임

0 정물알오름 : 오름 기슭에 정물샘(안경샘)이라 불려지는 샘물이 있음에 연유하여 정물오름, 이에 딸려 정물+알오름, 이를 한자로 정수악난봉(井水岳卵峰)이라 하고 있음

0 도너리오름 : 굼부리의 도(입구․어귀의 제주어)가 널찍하다 하여 도너리오름, 오름에 돌이 많이 있어서 돌오름, 예전에 이 오름에서 멧돼지가 내려왔다 하여 돗(돼지의 제주어)내린오름, 모양새가 골체(삼태기의 제주어)와 비슷하다 하여 골(ㅗ는 아래아)체․골체오름, 예전에 이 오름 기슭에 도을동(道乙洞)이란 마을이 있었으므로 인해 도을악(道乙岳)이라고도 한다. 2011년 12월 31일까지 휴식년제 실시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음

0 동광육거리 : 한창로와 옛 평화로(1135번), 그리고 동광단지와 구억리를 잇는 도로가 만나면서 육거리를 이뤄 제주 서부 지역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음

0 밝은오름 : 오름의 모양새가 달처럼 환하고 반반하게 생겼다 하여 밝은오름, 벌근(밝은의 제주어)오름, 이를 한자로 명악(明岳)이라 하고 있음

0 상창교차로 : 한창로와 중산간도로(1136번)가 만나는 곳으로 한창로는 여기서부터 창천삼거리까지 중산간도로와 중용됨

0 상창리 : 구전에 의하면 약 150년 전에 이 마을에 들른 한 풍수사가 이 곳에 있는 연못을 보고 그 형태가 마치 거북이 모양과 같다고 한데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 전체가 암반으로 덮혀 있는데 마치 거북이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하다. 본디 연못이 세 개나 있어 <웃성구못 >, <동성구못 >, <서성구못 >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 마을은 본디「창천리」와 한 마을로「웃창고내」라고 했는데 서기 1900년에 <하창리 > 즉「창천리」와 「상창리」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1년도에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었다. - 참조 : 마을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함)

0 창천리: 예전에는 '포시남마루'라 하여 10여 가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인데 1674년(현종 15년)에 대정현 상모리에 거주하던 강위빙(姜渭聘)이 설촌하면서 내(川)에 창고처럼 생긴 암굴이 있다 하여「창고천리」라 불렸다고 전해온다. 1914년 일제 강점시에 토지세부측량이 실시되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창천리」로 바꿔 부른게 오늘에 이른다. - 참조 : 마을홈페이지('걸어서 제주 속으로 3'에서도 소개함)

0 창천삼거리 : 한창로와 일주도로(1132번)/중산간도로(1136번)가 만나는 곳으로 한창로의 기점이 되는 곳임

0 창고천생태공원 : 2006년도 서귀포시에 의해 창천리 1,440번지 일대에 조성된 공원(면적 597㎡)으로 창고천의 연원인 창고샘을 비롯해 기암절벽과 상록수들이 산재하고 있음

창천삼거리에 자리한 가게 창문에 큼지막하게 적힌 다음의 글이 오가는 길손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보게 자네 / 내 말 들어 볼래 / 자식도 품 안에 자식이고 / 내외도 이부자리 안에 내외지. // 야무지게 산들 뾰족할 것 없고 / 덤덤하게 살아도 밑질 것도 없다. // 속을 줄도 알고 질 줄도 알아라 / 니 주머니 든든하면 / 날 소주 한 잔 사 주고 / 내 돈 있으면 소주 한 잔 또 사 주고 / 너요 내요 그럴 게 뭐고. // 가물가물 서산에 해 걸리면 / 자넨들 지고 갈래, 안고 갈래 / 우리 소주 한 잔 하게나. //

위 글은 원래 밀양 지방의 민요인 '한탄조' 한 구절인데 박목월이 정리하면서 '가물가물 서산에 해 걸리면 자넨들 지고 갈래, 안고 갈래'의 대목은 최치원의 한시(漢詩)를 인용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후 국순당에서 '백세주' 선전 문구로 이용하면서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이 글을 읽으며 잠깐이나마 나의 삶의 현주소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뾰족하게 살고 있을까? 덤덤하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나에게 소주 한 잔 사줄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를...'
(2011. 04. 03.)
2011-04-22 12: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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