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육아일기9> 내 마음 속의 은아!
 타잔
 2008-10-26 00:34:52  |   조회: 5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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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큰 아이였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7~22년 전, 나의 초등생 시절 동창생 중에 은아란 여자아이가 있었다. 기억의 첫 페이지엔 그 애의 키가 무척 크다고 기록돼 있다. 각인이 그리 깊지 않은데다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많이 퇴색돼 버린 추억의 책장이건만 온 신경을 집중해 반추해 보자니, 피아노 잘 치고 노래 '한가닥' 하던 음악에 재능있던 아이, 다소 터프한 목소리, 내로라 하는 장난꾸러기 남자애들의 접근조차 자연 차단시키는 조숙함 등등 내용이 제법 또렷하게 읽힌다.

어제 3차 술자리였다. 처음 6명이 마시기 시작, 차수가 늘어난 후 결국 회사 대선배 한명과 나만 달랑 꼬치구이 술집에서 취담을 나누며 마지막 술기운을 충전중이었다. 회사 이야기, 자녀 이야기를 안주 삼아 콩이다, 팥이다 떠들었다. 그런데 나의 등쪽, 나무토막 기둥 너머 자리에선 짐작컨대 '작업'이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처음 앉았을때 들린 소리, '누나야. 000(제3자)는 어떻고 저떻고'란 맥락의 남자아이의 평가 등이 주종을 이뤘다. 여자의 '그래'란 답이 간간이 들렸다.

쉼 없이 떠들어댈 땐 그들의 말을 놓쳤다. 그러다 술자리 한 차수를 채울만한 시간이 흘러 취기도 거나하게 돌 즈음, 선배와 나의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마침 들리는 저쪽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인생계획은 어쩌고 저쩌고...' 귀를 기울였더니 남자가 연상인 여자를 향해 처음 사랑 고백을 하는 것으로 판단됐다. '짜식~ 용감한데...' 여자는 망설이는 듯했다. 꿋꿋이 계속 되던 남자의 구애 중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그만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남자 왈 "은아누나!"

초등생 동창 걔는 당연히 아니었다. 일단 나이부터 한창 풋풋한 20대 초반의 예쁜 아가씨였으니, 아무리 '페이스 오프'의 시대라지만, 아니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도 적잖이 놀란 분위기였다. 눈빛으로 그들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뭐 잘못됐나요?' 민망했다. 객쩍은 미소 한방 날리며 머리를 도로 제자리로 돌렸다. 마음 속으론 이유를 설명하며. '사랑스런 내 딸내미의 이름이 은아여서 무의식중에 그리됐네요. 초보아빠의 실수입니다. 작업중에 미안해요.'
2008-10-26 00: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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