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6 - 일주도로(쇠소깍 입구~표선교차로)
 김승태
 2012-04-30 08:59:15  |   조회: 1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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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전국의 판세는 한 마디로 '안갯속'이라 한다. 여야는, 정책 대결은 아예 안중에도 없고 막말 파문, 논문 표절 및 재산 등록 누락 의혹, 민간인 사찰 등 온갖 정보를 총동원해 막판 네거티브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무려 20개 정당이 우후죽순 난립하면서 전국 비례대표 투표 용지 길이가 역대 최장(31.2㎝)으로 정당이 하나만 더 생겼더라면 개표기로 개표할 수 없는 상황도 연출될 뻔했다는 소식은 어떻게 해설해야 할는지? '최종 승자는 누구?',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제주의 일주도로 포장공사 준공식은 1971년 1월 29일에 열렸다. 이와 관련해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도지'(2006)에서는,
"일주도로 포장공사의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한림 건설부장관 등이 참석하고 도민 학생 등 2만 여 명이 참석하여 진눈깨비가 뿌리는 추위 속에서도 열기 가득한 환호 속에 거행되었다. 당시 도지사는 권용식이었는데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도로는 도민이 8년 동안 돌을 등에 져 나르며 만들어진 것으로 제주도민의 자립정신과 근면, 잘 살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의 결정체'라고 극구 칭찬했는데 박 대통령은 이후 제주도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종합개발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는 등 1979년 10월 26일 시해사건이 있을 때까지 일관되게 제주도개발을 강한 의지로 추진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6' 제6일째인 4월 8일은 옛 서귀포시와 남원읍 경계인 <쇠소깍 입구>에서 출발해 표선교차로까지 거닐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유채는 완연한 봄 기운을 만끽하기에 최상,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출발지까지는 버스로 이동했으며 도착지인 표선교차로까지는 주거리 22.3km, 보조거리 0.2km, 모두 22.5km였다. 5시간 16분이 소요되었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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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 입구(09:08)~신레2리(09:23)~위미마을(09:37)~위미3리교차로(10:19)~남원교차로(11:10)~소금밭교차로(11:40)~태흥3리사무소(12:25)~남원읍*표선면 경계(12:49)~모자상(12:52)~세화1리사무소(13:27)~매오름/도청오름 입구(13:45)~한지교차로(13:49)~표선교차로(14:24)

--- 주요 역사 현장

0 신례2리/공천포 : 1211년경 현재 신례 1리를 중심으로 현청 및 관청이 설치되어 식수와 제사 등 행사시 청정제수로 '맛이 좋은 샘물을 바친다'는 뜻으로 지명이 공샘이(공세미:貢泉味)라 하였음/공천에 딸린 포구 - 신례2리 마을 홈페이지에서 인용

0 위미1/2/3리 : 설촌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당초 명칭은 '우미'라 불려지다가 1416년(태종 16)에 '우미'에서 '뙤미'로, 1915년 제주도제 실시로 '뙤미'는 '위미리'로 개칭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고, 1989년 4월에 위미2리에서 3리가 분리되었음

0 남원교차로 : 일주도로와 남조로(1118호선)가 만나는 곳으로 남조로의 실제 기점이 됨

0 남원리 : 1200~1290년 경에 설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24년 경부터 남원리로 쓰기 시작했고 1926년 3월에는 당시 의귀리에 두었던 정의군 서중면 면치소(면사무소)가 이 곳으로 이전되었고, 1935년 4월에 남원면 소재지가 되면서 남원 1, 2 구로 구분되었다. 이후 1구는 남원2리, 2구는 남원1리로 개칭되어 1980년 1월 남원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남원리란 이름은 남쪽의 중심이란 뜻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태흥1/2/3리 : 1662년경에 설촌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폴개'라 불리었다. 1402년(태종 2년)에 정의군 서중면이라 하여 의귀리에 면치소를 두면서 벌포리라 불리었으며, 1897년(광무 2년)에는 보한리라 개칭되었다가 1902년에 태흥리로 변경하였고, 1925년부터 태흥 1, 2구로 분리시켰다가 1950년 8월에 태흥리로 합리(合里), 1953년 9월에 태흥 1, 2, 3리로 분리, 1961년 4월에 다시 합리, 1961년 8월부터 다시 태흥 1. 2. 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토산1/2리 : 1,000년 전에 설촌된 것으로 추측되며, 처음에는 토산리(土山里)로 쓰이다가 약 150년 전에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옥토망월(玉兎望月)이라 하여 토산리(兎山里)로 바꿔 불렀다. 1943년에 행정 구역을 재편하면서 '토산 1구', '토산 2구'로 분리되었으며, 1948년에 '토산 1리' '토산 2리'로 바꾼 것이 지금에 이르는데 지역주민들은 '알토산' '웃토산' 등으로 부른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모자상(母子像) : 2002년 12월 김승률 씨가 기증한 것으로 1948년 4.3사건 때 살아남은 어머님들이 한평생 동안 자녀 교육과 마을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기리기 위한 것임 - '걸어서 제주 속으로 1'에서 소개

0 산열이통/산이리통 : 마을 앞의 바닷가에서 용천수가 솟는데 물이 차고 좋아서 주민들이 여름에 더위를 식히고 땀띠를 없애기 위하여 목욕을 하며 더운 열을 식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 지금도 여름철에는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세화1/2/3리 : 1480년 경에 설촌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약향리로 부르다가 도내악(돈내오름)으로, 불리어졌음. 1936년 행정구역의 정비로 세화리로 개명되었다. 1988년에 1리/2리(가마리)/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매오름 : 오름의 모양새가 매를 닮았다 하여 매봉, 이를 한자로 대역하여 응암산(鷹岩山)․응봉(鷹峰)이라 하고 있음

0 도청오름 : 이 오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하는 바가 없다. 오름의 위치가 매오름과 이어져 있는 곳으로 매오름에서 보면 이 지대가 따로 떨어져 어떤 형태를 이룬 것 같다고 하여 도청오름이라 명명되었다고도 한다. 이를 한자로 대역하면 도(渡 : 건너다)+ 청(淸 : 빛이 선명하다)이라 할 수도 있겠음

0 표선교차로 : 일주도로와 번영로(97호선)가 만나는 곳으로 번영로의 실제 기점이 됨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정책 대결을 통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 보다는 상대를 헐뜯고, 걸핏하면 '00 심판, 00 사퇴 요구, 00 고발의 으름장' 등이 난무하는 난장판인 게 선거 기간 동안의 실정이다. 권력이 무엇인지? 그 권력 때문에 어제의 동지가 적으로 돌변하고 언제 그랬냐 듯이 말 바꾸기도 서슴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이 살면 100년을 살까? 1,000년을 살까?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갈 때 마지막으로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모르고 있을까? 이름 석자 남지 않더라도 허망한 욕심 모두 버리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칠 수는 없을까? 선거 기간 때는 굽신거리며 한 표를 구걸(?)하던 후보가 선택되는 순간부터 민초들 위에서 군림하는 볼썽 사나운 모습들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까? 진정 지역과 대한민국을 위하고자 하는 후보라면 권모술수가 아니라 비우고, 베풀고, 덕을 쌓음이 우선 되어야 할 것 같다. 일부 정치인들의 자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며,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앞날도 밝아질 것이다.
2012-04-30 08: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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