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길 따라 오름 따라 059> 방어유적, 봉수 - 느지리
 김승태
 2009-09-06 07:18:51  |   조회: 6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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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烽燧)는 봉(烽 : 횃불)과 수(燧 :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시설이다. 높은 산이나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라 알려지고 있다. 현재 제주에는 25곳의 봉수와 38곳의 연대(烟臺)의 자취가 남아있는데 그 중 한림읍 느지리오름에는 명월진 소속의 만조봉수가 세워졌던 곳이다.

만조봉수는 원래 느지리(망오름)의 서쪽 4.3㎞ 지점에서 남쪽 700m 지점에 있는 판포오름(해발 93m)에 세워졌었는데 지대가 낮아 그 구실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지자 상명리에 있는 느지리(망오름)로 봉수대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오름 정상부에 봉수대 흔적만 남아있다.

느지리(망오름 晩早岳 望月岳, 한림읍 상명리 산 5번지, 표고 225m, 비고 85m)는 일주도로(1132번)변의 협재사거리에서 월림리 쪽으로 3.0㎞(월림삼거리에서는 1.6㎞임)를 가면 오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기슭에 연한 길을 따라 상명리 쪽으로 50m를 더 가면 등정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 오름은, 상명리의 옛 이름이 느지리였음에 연유하여 느지리오름, 이 오름에 만조봉수가 있었음에 망오름, 이를 한자로 만조악(晩早岳), 망월악(望月岳)이라 하고 있다.

세 개의 봉우리가 두 개의 굼부리를 형성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오름이다.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경방초소가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안과 석양의 모습(상명망봉:上明望峰)은 장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한라산 백록담을 정점으로 펼쳐지는 정경도 최상급을 자랑한다.

기슭에 세워진 오름 표지석에는,
"한림읍 상명리 본동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는 표고 225m(비고 85m)의 오름이다. 예로부터 이 일대를 느지리라 불렀고 이 오름은 느지리오름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이 오름 정상에 느지리망/만조망이라는 봉수대를 설치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망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이 오름에는 3개의 봉우리와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팬 2개의 굼부리(큰암메와 족은암메)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름 전체가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나무(해송),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자귀나무, 쥐똥나무, 그리고 청미래덩굴, 찔레 등이 어우러져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오름 북쪽 기슭에는 천연기념물 제236호 제주도용암동굴지대(1971년 9월 30일)의 하나인 소천굴/황금굴이 있는데 2011년까지는 출입이 금지된 상태이다. 한편, 제주시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여가 선용과 오름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등성이를 따라 목재데크와 타이어매트로 1.2㎞의 산책로(2007. 11. 30.~2008. 2. 27.)를 개설하였다.

☞ 봉수와 연대의 기능과 시설
제주도내의 봉수대는 크게 산(오름) 정상부에 설치된 봉수와 해안 구릉에 설치된 연대로 나눌 수 있다. 봉수와 연대의 기능적 차이는 봉수대는 50리 밖을 감시하고, 연대는 해상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해상에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난 것을 봉수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그 배가 표류선(漂流船)인지 적선(賊船)인지의 분간은 연대에서 식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연대에는 직접 적과 대치해야하는 위험도가 뒤따르는 만큼 요새적 시설이 필요했다. 조천읍 신흥리에 있는 왜포(倭浦)연대의 내, 외벽의 시설은 적과 대치 시 전투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고려하여 축조한 예이다.

봉수는 일반적인 경우 석축함이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 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이중의 배부시설로 도량을 만들었다. 그러나 안덕면 감산리 이두봉(伊頭峯)에 있는 호산봉수는 지대가 평지인 까닭에 타원형으로 석축하여 그 속에 봉덕을 시설한 예도 있다.

연대는 해안을 감시하기 용이하고 적과 전투 시 유리한 곳에 석축(石築)하였다. 축조 규정에 의하면, 높이 30척, 밑변은 1변의 길이가 20척인 방형의 축대를 쌓았다. 연대의 둘레 밖으로는 깊이 10척, 너비 10척의 해자(垓子 : 밖으로 판 호)를 켜도록 되어 있으나, 도내에서는 해자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높이와 크기도 지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 해안의 높은 지대에 방형으로 축대하였다. 간혹 지형에 따라 원형(圓形)으로 축대한 곳도 있다.

그리고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誤認)을 막기 위에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일체 금하였다. - ‘제주도의 '제주의 방어유적'(1996)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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