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5 - 이야기가 있는 쉐질
 김승태
 2012-01-04 11:19:06  |   조회: 7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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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수산식품부가 추진하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은 권역별 연차 사업(5개년)으로 제주 지역의 경우 지금까지 8개 권역이 선정돼 2개 권역(한경면 판포권역, 안덕면 감산/대평권역)이 완료됐고, 웃뜨르권역, 녹고뫼권역, 가시리권역, 김녕애(愛)권역, 무릉도원올래권역, 번뇌골권역은 진행 중인데 권역별로 50~7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녹고뫼권역은 ▲ 생태탐방로, 생태학습체험장 등 오름ㆍ목장자원을 이용한 5개의 사업 ▲ 특산물판매장, 전통맛골, 친환경사료시설 등 3개의 소득사업 ▲ 웰빙캠프촌, 건나물생태연못복원 등 6개의 마을 자원 활용 등 총 15개의 시설사업 ▲ 마을 리더(주민)교육ㆍ훈련, 마을운영ㆍ홍보 프로그램 개발과 컨설팅 등 소프웨어 사업 등 지역 실정에 맞는 사업들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이야기가 있는 길, 쉐질' 11.0km를 개설했으며, 지난 10월 2일에 개설 기념 행사도 가졌다. ‘쉐질’은 소가 지났던 길을 뜻하는 제주어로 마을 내 끊어진 갓길을 복원ㆍ정비해 탐방로를 개설하여 장전리와 유수암리, 그리고 소길리의 살아 있는 문화와 역사 자원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테마의 길들이 제주올레를 넘어서 제주의 길로 각광받을 날이 머잖아 올 것으로 기대되기에 '걸어서 제주 속으로 5'의 마무리는 그 '쉐질'을 걷기로 했다. 지난 15일부터 내린 눈은 17일 오전 7시 현재 한라산 윗세오름에는 86cm, 진달래밭 77.5cm 등 누적 적설량을 기록하면서 올 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을 나타냈지만 일요일인 12월 18일은 바람도 불지 않고 포근해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장전초등학교 주차장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으며, 장전리사무소를 출발해 원점회귀하기까지는 주거리 11.0km, 보조거리 0.5km 모두 11.5km였고, 3시간 20분이 소요되었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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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리사무소(09:05)~장전포제단(09:16)~소길/당밭할망당(09:39)~소길리종합복지회관(09:42)~쉐질-잣길 입구(09:58)~석관(10:11)~소길포제단(10:19)~거리못(10:27)~좌랑못(10:32)~초가집과폭낭쉼터(10:55)~하르방당(11:02)~흘이물유적비(11:11)~유수암리사무소(11:35)~(동)선돌(11:42)~108계단(11:52)~유수암천(11:57)~(서)선돌(12:06)~건나물(12:16)~장전초 주차장(12:20)~장전리사무소(12:25)

---- 주요 역사의 현장

0 장전리 : 옛 이름은 진밧 또는 장밧이다. 긴 밭이라는 뜻으로 장전(長田)은 한자 차용 표기이다. 진밧은 김통정 장군이 대몽항쟁 당시 장전 일대를 군사훈련 장소의 책임자에게 지급한 토지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대몽항쟁 군사들과 제주 사람들이 촌락 형태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1948년 4·3사건 때 정부 소개령으로 가옥이 전소되었으나, 1949년 마을을 재건하였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사장 터에 밭을 만들었으므로 사장밭, 장밭 또는 장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장전리가 되었다. - 참조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0 장전포제단 : 포제단은 장전마을 남쪽 '포젯동산'에 마련되어 있는데, 액을 막고 복을 줄 것을 빌던 마을의 제단이다. 제단위에는 '酺神之位'라 새긴 돌위패를 두었고 제단 좌우와 뒤쪽에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보호벽을 만들고, 그 위에도 같은 형태로 다듬은 돌을 덮어 비를 가렸음

0 소길/당밭할망당 :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를 마을 주민들은 송씨 할머니 변신으로 여기면서 본향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나무를 당산목이라 부르고 있고, 보호수로 지정(1991. 01.)하였다. 이 일대를 당밧(당이 있는 밭)이라 하고 있음

0 소길리 : 마을 옛 이름은 '쉐(소)+질(길)'이다. 설촌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치 않으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지금의 속칭 좌랑못 부근과 신산머르 부근에 이미 산발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귀량이터(歸梁伊基)가 있다. 그 후 분산적 주거 상태가 폐허가 되고 현 마을은 300여 년 전에 성씨, 송씨, 허씨와 그외 선조들이 입주하여 오늘이 살기 좋은 마을 형태를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초반에 쉐질을 표준어 소길로 인식한 뒤 이를 좋은 뜻을 가진 한자 소길(召吉)로 표기하였다. - 마을홈페이지에서 옮김

0 쉐질 : 소 한 마리가 지날 정도로 폭은 좁지만 밭과 밭 사이 지면보다 1m 정도 높게 잣길로 축조되어 소들이 밭으로 내려와 농작물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지혜가 엿보임

0 석관 : 석관의 주인이나 연대는 알 수 없는데 1970년대 초 그 가치가 논의되어 3개소의 연못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꽃동산/풋감언덕(소길리 771-1번지)에 보존하고 있음

0 흘이물 : 원래는 자그마한 하천(유수암리 1473-1번지 동쪽)이었는데 중산간 개발과 제주경마장이 들어서면서 물길을 이 하천으로 돌려 커졌다고 한다. 2008년 12월에 유수암리민 일동이 흘이물의 유래를 담은 유적비를 세움

0 유수암리 : 1271년(고려 원종 21년) 항몽삼별초군이 항파두성에 웅거할 때 함께 따라온 어느 한 고승이 유수암 절동산 아래 용출하는 맑은 샘을 발견하고 언덕 아래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하고 불사를 시작한 것이 이 곳에 처음 인적이 닿은 시초이며, 또한 항파두성 함몰 직전 김통정 장군의 모친과 일부 수하들이 유수암 종신당으로 피신하여 토옥을 짓고 여생을 보낸 것이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이며, 삼별초군을 토평한 원나라가 상동에 목자촌을 설립 금물덕리라 했으며 조선 초기 좌수 홍덕수의 설촌으로 정상적 제도를 갖춘 마을이 이루워졌다.

일제 시대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금덕리로 변경해 불리다가 '옛 지명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1996년 1월부터 유수암리로 불리고 있다. - 마을 설촌 유래 참조

0 유수암천 : 유수암리 마을 형성의 연원(淵源)이 된 이 샘은 극심한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며 여름에 차갑기가 빙수와 같고 겨울에 따스함이 온천을 방불하게 한다. 고려 중엽 항파두성에 삼별초군이 웅거할 즈음에도 이용했다고 하는 전해오고 있다. 마을 운동장과는 108계단으로 연계되고 있음

0 (서)선돌 : 마을을 수호하는 오방신장석의 하나로 오랜 세월 풍우를 이겨내고 웅장한 모습으로 마을 서쪽에 세워져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충혼비 좌대로 이용되기도 했었는데 2007년 봄에 옛 모습으0로 재현시켰다. 방향에 따라 동, 중, 서 세 군데 세워놓았음

0 건나물 : 마을 어르신들의 놀이터였던 곳으로 바닷가에 놀러가기가 어려웠던 중산간 마을의 특징 상 이 곳 건나물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다고 전해 옴

0 장전초등학교 : 1946년 8월 장전공립국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1949년 1월 4.3사건으로 교실 전소되어 폐교되었다가 1950년 5월 재인가를 받고 복교하였다. 1974년 4월 금덕분교장을 개교하였다가 1992년 3월 금덕분교장을 폐교하였다. 애월읍 장전리 435번지에 있음

대한민국은 길의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을 염두에 둔 길은 지역 주민들이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또한, 길을 통해 지역의 문화를 알게 하고 나아가 지역 주민들의 소득 창출을 연계시킴을 우선하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길의 조성은 노약자, 남녀노소, 장애우들이 최대한 함께 거닐 수 있는 세심한 배려도 필요할 것 같다.

한편, 쉐질의 코스 설정에는 지역의 문화를 최대한 담아내고 있겠지만 이정표와 안내문, 지도, 쉼터, 편의시설 등에서 다소 미흡한 면도 찾을 수 있었다. 모자란 부분들을 보완하고 체류형 관광이 가능하도록 좀 더 지혜를 모은다면 쉐질은 제주의 대표적인 길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제주의 길 관광은? 제주올레가 아니라 바로 이런 주제(테마)가 있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2011. 12. 18.)
2012-01-04 11: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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