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6 - 일주도로(고성교차로~한동리)
 김승태
 2012-05-21 08:08:23  |   조회: 1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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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는, 4월 1일 현재 성산일출봉 탐방객은 50만 7천여 명으로 지난해 동기 40만 명에 비해 26.8%(10만 7천명) 증가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성산일출봉이 지난 2007년 7월 세계자연유산 등재, 2010년 10월 세계지질공원 인증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관람객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작년 11월 제주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선정됨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세계 7대 자연 경관 선정, KBS의 '추적 60분'을 비롯해 일부 언론에서 선정에 따른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파장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갔고, 급기야는 제주참여환경연대 등 7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월 9일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과정과 투표전화요금 등과 관련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이에 감사원은 지난 4월 9일 "제주 지역 시민단체들이 공익감사를 청구한 내용 가운데 일부에 대해 감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며 "하지만 감사 내용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으며, 감사 일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감사 결과에 따라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장도 예상되고 있다.

총선이 끝나면서 주춤했던 제주의 봄 관광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한다. 5월 말까지 주말 항공권 예약률이 90%를 상회하는 등 수학여행단을 포함한 단체 여행객, 개별 관광객들의 제주 방문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6' 제8일째인 4월 15일, 우도에서 열리는 소라축제 영향도 있겠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오가는 관광버스와 렌트카들이 유난히 많아 보였다. 출발지인 고성교차로까지는 버스로 이동했으며 도착지인 한동리까지는 주거리 14.6km, 보조거리 0.2km, 모두 14.8km였다. 3시간 46분(문화 탐방 시간 제외)이 소요되었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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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교차로(09:29)~오조리(09:51)~오조한도교/성산고 입구(09:54)~시흥리(10:00)~성산읍*구좌읍 경계(10:48)~종달리(10:55)~금붕사 입구(11:13)~하도리(11:48)~세화고 입구(12:18)~세화오일장 문화 탐방~구좌읍사무소(13:37)~평대리(13:50)~한동리(14:20)

-- 주요 역사 현장

0 고성리 : 1259∼1274년 경에〈장만이동산〉부근에 설촌이 이뤄졌다고 전해오고 있고, 1915년 도제가 실시되어 정의면 고성리가 되었다. 1933 년 제주도 성산면이라 개칭하고 고성리 1구, 2구(현재의 신양리)로 나누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오조리 : 고려 말기에 설촌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옛 지도에는 오조촌(吾照村)이라 표기하고 있다. 오조포(五照浦)는 한때 이 마을의 이름으로도 불리워졌으나 지금은 마을의 중심 포구를 일컬으며 성산항과 마주한 어항이다. 이 마을의 이름 오조(五照)는 성산 앞바다 일출봉 건너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을 펴면 가장 먼저와 닿은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시흥리 : 약 500여 년 전에 설촌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옛 이름은 '심돌'이다. 19세기 후반 한 때 '심돌'과 '새심돌', '묵은심돌' 등 2~3개의 마을로 나뉘기도 했으나 다시 '力乭/심돌'로 통합되었다가 옛 정의현과 제주목 경계에 있어 정의현의 시발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시흥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멀미오름 : 지미봉의 유래와 같이 땅 끝에 있으므로 말 미(尾), 그 모양이 되(곡식이나 액체․가루 따위의 분량을 재는 그릇)와 같다고 해서 말(斗), 동물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머리(頭), 종달리에서 볼 때 이 오름은 오방(午方)에 위치하므로 인해 오(午)가 말(馬)로의 전이, 말을 방목하기에 최적지라는 데서 말(馬)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모양새가 호랑이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각호봉(角虎峰)이라 불려지기도 함

0 종달리 : 이 마을의 설촌 연대는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대략 두 가지 설이 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은월봉을 중심으로 <넙은드르·대머들·황무동 > 등 여러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는 설과 남평 문씨가 <문쟁이올래 >에 터전을 잡고 거주했다는 설이 있다. 1416년(태종 16년)에 정의(旌義)와 대정(大靜)의 2현(縣)을 신설할 때 종달리는 '제주목의 끝 마을, 즉 마지막 마을'로 '종달'이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지미봉 : 제주의 서쪽 한경면 두모리를 섬의 머리라 하고 동쪽 끝의 이 오름을 땅끝이라 한데서 지미(地尾)라 했는데 옛 기록에는 지미산(指尾山), 지미악(地尾岳․只未岳), 지미봉(池尾峰), 종달봉(終達峰)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음

0 상도리 : 500년 전에 설촌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예전에는 도로리 도려(道路里 陶廬)라 불렸는데 이는 중국 도연명(陶淵明)이와 같은 전원시인이 사는 집의 마을이라는데서 연유한 것이다. 1702년(숙종 28년)에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상도의(상도리)라 적어있음을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상도리는 여기서 우러나왔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하도리 : 예전에는 별방(別防)이라 했다. 제주지방기념물 24호로 지정된 별방진(別防鎭)이 1510년(중종 5년) 제주목사 장림(張琳)에 의하여 김녕방호소(金寧防護所)를 하도의탄리(하도의리)경에 이전하여 축성하고 이를 별방진이라 하는데서 유래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세화리 : 1400년 경에 설촌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예전에는 '고는곶'이라 불렸다. 세화리는 '곶'을 꽃으로 미화해서 지어진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형상 목사(李衡祥牧使)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세화란 지명으로 알려져서 300년 전에 이루어진 리명으로 추측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평대리 : 언제 설촌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옛 이름은 벵디이다. 벵디가 평대로 변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평평한 들판이라는 벵디의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0 한동리 : 이 마을 설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예전에는 '괴' 또는 '괴이리'라 불렸다 한다. - 마을 홈페이지 참조

제주의 여럿 길들 중 가장 많이 다녔던 그 길로 접어든 날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에는 통학(종달리~세화리)으로, 직장인으로서는 통근(세화리~제주시 / 오조리~제주시)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갔던 그 길. 그러기에 제주의 그 어느 길 보다도 더욱 정감이 간다. 현재의 일주도로가 아니라 예전의 좁고 비포장 일주도로를 기억함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으며, 그 길에 서렸던 잊혀진 추억들도 새록새록 솟아나왔다.

나이가 들어가면 '꿈과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들른 세화오일장에서의 문화 탐방, 코발트빛의 세화 바다 조망은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겨 주었다. 추억은 먹되 꿈은 쉼 없이 자꾸 엮어가야 할 것 같다. 먼 훗날 반추할 또 하나의 추억을 위해서라도~
2012-05-21 0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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