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길 따라 오름 따라 052> 삼복(三伏) 더위에 - 영실
 김승태
 2009-07-17 16:31:14  |   조회: 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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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三伏)은 일년 중에서 더위가 가장 심한{혹서(酷暑)} 시기이기도 하기에 삼복더위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삼복(三伏)은 음력(陰曆)의 개념이 아닌 양력(陽曆)의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초복(初伏)은 하지(夏至)로부터 세 번째 돌아오는 경일(庚日)이고, 네 번째 경일(庚日)은 중복(中伏)이며, 입추(立秋)로부터 첫 번째 경일(庚日)이 말복(末伏)이다.

삼복(三伏)의 풍속은 더운 여름철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주식(酒食)을 마련해서 계곡이나 산을 찾아 더위를 잊고 하루를 즐기는 여유를 지녔던 것입니다. 올 양력(陽曆) 2009년의 삼복(三伏)은 초복이 7월 14일이고, 중복은 7월 24일, 말복은 8월 13일{월복(越伏)}이다.

특히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처럼 땀을 많이 흘리는 계절에 원기(元氣)를 회복하는 음식을 마련해서 더위를 이겨낸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복음식(伏飮食)으로서는 삼계탕(蔘鷄湯), 개장[구장(狗醬), 구탕(狗湯), 보신탕(補身湯)], 팥죽 등이 있다.

삼복(三伏)의 계절에 영실을 찾아가 무더위를 식혀봄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불리는 영실은 오백장군(오백나한 영실오름 영실기암 石羅漢 千佛峰 修行洞, 서귀포시 하원동 산1-1번지, 표고 1,639.3m 비고 389m)으로서 한라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정상부에는 출입할 수 없으나 등산로(영실코스)를 따라 오르내리며 기암(奇巖)들의 오묘함을 조망해 보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이 오름은 5백여 개의 바위가 있음에 연유하여 오백장군(五百將軍), 오백나한(五百羅漢), 산신령이 살고 있는 골짜기의 의미로서 영실오름, 영실기암(靈室奇巖 : 이원조 목사가 제주의 명승 ‘영주십경’을 정할 때 지칭), 석라한(石羅漢), 서쪽의 병풍바위와 한데 묶어 예전에는 천불봉(千佛峰), 또한 곁에 존자암(제주도문화재 제43호로서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 있음에 수행동(修行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 1833∼1906)은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서
" (전략) 영실(瀛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위하게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천불암 또는 오백 장군이라 불리는 곳으로, 산남(山南)에 비하면 이 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산 밑에 시내 하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에 있기 때문에 얕게 드러나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내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들이 말을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 왔다. (후략)”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 1903∼1983)은 ‘한라산등반기(漢拏山登攀記)’에서,
“(전략) ‘탐라지’에 [영실은 한라산 서남쪽 허리에 있어 삭벽천인(削壁千仞)으로 괴석이 열지어 서 있다] 하였거니와 여기가 바로 영실(靈室)이라 부르는 곳인데, [영실]이라는 [실]은 동곡(洞谷)의 우리말이요, [실(室)]은 한자의 음역(音譯)인듯하다. 여하간 영실은 실로 한라산의 만물초(萬物草)인데, 그 구도(構圖)와 형상이 금강산의 만물초와 다름이 없어 오백장군이라는 별호도 있고, 석나한(石羅漢)이라는 이칭(異稱)도 있다. 오백장군이라 함은 초동목수(樵童牧竪 : 나무꾼과 소치는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요, 석나한이라 함은 불가의 승려들이 지어낸 이름일 것이다. 이 영실의 동부(洞府) 속에 전일에는 존자암(尊者庵)이란 암자가 있었고, 그 앞에 열린 이 동부를 수행동(修行洞)이라 부르던 것인 줄은 고기(古記)에 의하여 알겠거니와, 존자암이란 이름은 법주기(法住記)에서 그 유래를 가져온 것일 듯하다. (하략)”라 기록하고 있다.

☞ 영실(靈室)에 얽힌 전설

영실(靈室)의 ‘실’은 골짜기의 옛말로서 室(실)이라는 한자를 빌어 표기하고 있으며, 영실이란 산신령이 사는 골짜기 즉 신령스런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득한 옛날 한 어머니가 아들 5백을 낳아 이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식구는 많은데다 집이 가난하고 마침 흉년까지 겹치니 끼니를 이어가기가 힘들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 와야 죽이라도 끓여 먹고 살게 아니냐≫고 타일렀다. 오백형제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큰 가마솥에다 불을 때고 솥전위을 걸어 돌아다니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어머니는 죽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형제는 돌아와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여늬 때보다 죽이 맛이 좋았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동생이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하게도 뼈다귀를 발견했다.
다시 잘 저으며 살펴보니 사람의 뼈다귀임이 틀림없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빠져 죽었음이 틀림없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불효의 형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동생은 이렇게 통탄하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 (遮歸島)으로 달려가 한없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그제야 사실을 알고 여기저기 늘어서서 한없이 통곡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영실에는 499봉이 있는 셈이고 차귀섬에 막내동생 하나가 떨어져 나와 있는 셈이다. 차귀섬의 오백장군은 대정읍의 바굼지오름(簞山)에서 훤히 보인다.
어느 해였든가, 어떤 지관 (地官)이 바굼지오름 에서 묏자리를 보게 되었다. 지관은 정자리를 하나 고르고는 ≪이 묏자리는 좋긴 좋은데 차귀섬의 오백장군이 보이는 게 하나 흠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묏자리만 좋으면 그것쯤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차귀섬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곧 도끼로 그 바위를 찍기 시작했으나 워낙 큰 바위라 없애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귀섬의 오백장군에는 도끼로 찍어 턱이 진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이 바위가 되며 흘린 피눈물은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가 봄이 되면 철쭉 꽃으로 피어나 온산을 붉게 물들인다. 설문대 하르방과 아들들을 모두 잃어버린 설문대 할망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옛날부터 한라산 등반길에서 큰 소리를 지르면 갑자기 안개가 끼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는데 이는 설문대 할망이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제주의 전설’에서 옮김
2009-07-17 16: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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