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연호를 부활시켜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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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前 제주문화원장/수필가

10월 3일은 개천절,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통치 이념으로 단군조선을 개국한 날이다. 대한민국 탄신 4344돌,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마음으로 경축할 일이다.

 

지금은 한반도로 국한된 작은 나라지만 예도옛적엔 12개 분국을 품은 광대한 나라였다. 천산(天山) 한인(桓因) 시대의 한국(桓國)이 그렇고, 아사달 한웅(桓雄) 시대의 배달국도 그렇다. 만주 일대를 강역으로 건국한 단군조선도 중국이 두려워하는 강국이었다. 세계의 석학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홍익인간은 지금도 우리나라 정치와 교육의 최고 이념이 되고 있다. 하지만 단기연호는 까맣게 잊고 산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뿌리 깊은 식민사관 때문이다.

 

식민사관을 전파한 주역은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단군조선을 없애는 조선사 편찬에 적극 협력한 이병도, 이완용의 질손이다.

 

그는 광복이후 서울대 초대 역사학 주임교수로 발령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의 행운은 민족의 불행이었다. 그 제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이 오늘에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2004년 8월 한·중 외교부가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왜곡된 주장을 중단 시정한다.’는 합의를 한 바 있다. 하지만 요즈음도 중국 정부 기관에선 ‘고구려는 중국 역대 왕조가 관할하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보도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게 한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을 불렀다’고 말한다.

 

이병도는 타계하기 3년 전인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단군은 실제 인물이며 단군조선은 실사다”라고 자신의 학설을 뒤집었다.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그에게 학위를 받아 대학 강단에 선 제자들은 스승의 양심선언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설 자리가 문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간지 22년 만인 2007년에야 겨우 초·중등 교과서에 단군이 자리를 잡는다.

 

한민족의 뿌리를 증명하는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위서로 몰아버리는 저들에 맞서 단군 조선을 철저히 연구하지 못한 민족사관 사학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단기 연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사용하였다. 광복이후엔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명기, 공식연호로 써왔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구미 열강이 쓰는 서기를 국가 공식 연호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 1962년 1월, 단기연호 사용이 금지된다. 약소국의 슬픔이다.

 

불교계에선 오래전부터 단기연호 부활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찰에서 펴내는 달력 등에 병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민족역사문화찾기 추진위원회와 국학원 등에서 단기연호 병기를 위한 백만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7월부터 시작된 서명운동은 47일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제주에서도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9월 13일 한민족 역사문화 찾기 추진위원회 제주지부와 제주 국학원이 서명운동을 펴, 두 시간 만에 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이다.

 

단기연호를 부활하는 것은 2000년간 만주 지역에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이 있었음을 세계에 선포하는 일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 함이다. 이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문화의 유구함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일이 될 터이다. 얼마나 떳떳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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