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坡 李基休 선생님
靑坡 李基休 선생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일생을 천직처럼 교단에 몸바친 제주교육의 산 증인이자 최고 원로인 선생께서 기어이 가셔야만 했습니까?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늘 건강하기만 했던 선생께서 “나는 120세까지 산다!”고 장담하시더니 98세의 천수를 누리긴 했지만 기어이 훌훌 떠나셨습니다.

선생은 1905년 유서 깊은 민속마을 표선면 성읍리에서 두찬(斗燦)공의 5남으로 태어나 정의(旌義)공립보통학교와 제주농업학교를 거쳐 전남사범학교의 강습과를 졸업했다.

처음 전남 일로(一老)보통학교에서 훈도로 시작한 선생은 이 학교에서만 10여 년간 훌륭히 근속하여 ‘공적비’까지 세워져 있다. 그후 제주의 남원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하다 선생의 농업실습성적이 높이 인정되어 서귀공립농업실수학교의 교유로 발탁되었다.

일정시 제주의 중견농업인을 교육하던 선생은 해방과 함께 서귀농업실수학교가 서귀중학교로 개편되자 초대 교장이 되어 중등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후 서귀중학교가 서귀농림고등학교로 승격되자 계속하여 교장으로서 영농인재를 양성하는 데 선생의 타고난 근면성과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선생의 특기를 꼽으라면 무엇보다 부지런하고 명실공히 농업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신농업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선생은 함덕농고에서 6년간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 세 차례에 걸쳐 18년간이나 서귀농고 교장을 맡으면서 젊은 영농후계자를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도 매일 일찍 출근하여 학교를 돌아보고 조회가 끝나자마자 작업복 차림으로 호미와 괭이를 들고 억척 같이 일을 하는 무서운 농군이었다.

그렇게 근엄하고 일에 열중하던 선생도 퇴근시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함박웃음을 웃어가며 선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늘 비법으로 빚은 각종 ‘건강 열매술’을 대접하며 선생 특유의 인생철학과 여흥을 즐겼다.

선생은 술을 즐기되 과음하지 않고 한 잔 술을 조금씩 여러 차례에 나누어 마시기 때문에 밤 새도록 마셔도 취하지 않고 담론을 계속했다. 선생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귀중한 경험담과 철학을 거침없이 쏟아놓기도 했다.

그리고 취흥이 일면 꼭 부르는 애창곡이 있다. 윤극영 작사 작곡의 ‘반달’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를 소리 높이 부르며 양손을 들어 유희를 곁들였다. 선생 특유의 주도(酒道)와 다정다감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1970년 서귀농고 교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선생의 정년퇴임장은 많은 제자들과 기관.단체장, 학부모, 학생들로 인산을 이루었다.

선생은 정년퇴임한 후에도 32년여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다. 서귀포노인회장을 맡아 노인의 권익과 복리 증진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리고 퇴직교육자들의 유일한 모임인 ‘제주교육삼락회’의 회장을 맡아 회원 간 유대와 제주교육 발전에도 계속 진력하였다.

선생은 일생 동안 교육만을 위해 헌신한 공적이 높이 평가되어 교육부문 ‘제주도 문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제주교육의 산 증인이며 선구자로서 후진을 인도하신 선생님! 이제 그 일손을 다 놓으시고 영원한 휴식처를 찾아 꼭 가셔야만 했습니까?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던 후배가 머리 숙여 생전의 온화한 모습을 떠올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