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제주도지사 퇴임.해군 복귀
40.제주도지사 퇴임.해군 복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제주에 큰 관심과 애정 보여준 박 대통령에게 감사”
"현역 해군이 도지사로 임명된 것은 제주도에 행운"
▲ 김영관 제주도지사(왼쪽에서 둘째)가 부임 후 안덕면사무소를 초도방문 후 면사무소를 나서고 있다. 지사가 현역 해군인만큼 군복차림이 이채롭다.

나는 1963년 12월 20일 오후 제주관광호텔에서 2년 7개월 동안 수행해 온 영광스런 제주도지사직을 떠나는 이임식을 가졌다.

 

3공화국 정부가 탄생한 지 3일째이자 새로운 강우준 도지사가 취임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많은 도민들이 떠나는 나를 위해 이임식에 참석해서 지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정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했다.

 

나도 그 분들과 정이 깊게 들어 제주도를 이제 떠나야 한다는 아쉬운 생각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임식 하는 내내 나는 지사취임 후 도내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제주도와 제주도민들을 처음으로 알아가던 일, 제주도 발전을 위해 홍콩, 하와이같은 개발의 비전을 세우던 일, 군사정부와 함께 제주개발을 추진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나를 믿고 따라 준 제주도의 공무원들과 유지들, 언론인, 기업인들, 도민들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현역 군인으로 행정을 처음 하는 30대의 젊은 도지사로 나를 기쁘게 도와 준 많은 도민들이 나로 하여금 영원한 제주도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했다.

 

나는 새로운 도지사가 제주신문사 강우준 사장이었던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강우준 지사는 내가 지사직을 수행할 때 나와 함께 모든 일을 함께 하고 어려운 도정 일을 함께 상의하고 내가 의지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중요한 사업들을 잘 이해하고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내 희망대로 해군으로 원대 복귀 할 수 있었다.

 

나는 도지사로 재직하던 1963년 2월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했었다.

 

그리고 군으로 원대 복귀한 첫 보직이 군연합참모본부 군수계획국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임식 후 며칠간 가족들과 이삿짐을 싸고 도내에 인사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12월 25일이 돼서야 서울로 떠났다.

 

합참 군수계획국장에서 다시 진해 해군통제부 사령관, 한국함대사령관을 차례로 거치고 나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해군참모총장이 됐다.

 

그때가 1966년 9월 1일이었다. 도지사에서 퇴임한 후 2년 8개월여 만이었다.

 

진해 해군통제사령부 시절 나는 대통령 별장과 공관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돼 또다시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게 되는 특별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때 박 대통령은 나를 보면 제주도 생각이 난 듯 제주도에 대한 얘기를 내게 빠짐 없이 들려주었는데 제주도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박 대통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해군참모총장으로 있던 1969년 1월 1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대장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 나와 함께 공군에서는 김성룡 참모총장, 해병대에서는 강기천 사령관이 각 군에서 대장으로 처음 진급했는데 이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군과 공군에서는 육군만이 대장이 있었고 국방장관, 합참의장 모두 육군출신이 독차지하는 것을 빗대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육방장관, 육참의장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하곤 했다.

 

특히 해군참모총장의 임기는 보통 2년이었지만 나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7개월을 더해 2년 7개월간 재직한 후 1969년 4월 1일 군에서 예편했다.

 

내가 1946년 해군사관학교 1기로 군에 들어온 후 24년째 되던 해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도지사에 재임했던 기간과 또 같은 기간을 해군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군에서 예편한 나는 제3비료공장인 영남화학 사장을 지냈고 그 이후에 베트남전쟁이 막바지를 치닫던 때 마지막 주 베트남 대사를 했다.

 

내가 해군참모총장이 되고 베트남 대사가 된 것은 모두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던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해 통제부사령관을 재직할 때인 1965년에는 제주도종합개발계획추진위원회 고문역할을 했고 해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인 1966년 10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3위에 입상했던 제주팀이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해군의 통근버스를 제공해 서울구경을 시켜줬던 일도 기억난다.

 

내가 5·16에 참여한 군의 주체세력이 아니었음에도 군사정부의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것은 내가 해군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정부하의 지방장관은 그 지역의 사단장(장성)이 겸직을 했는데 제주도는 대령이 제주해군기지사령관이 담당하고 있었고 마침 준장이던 내가 국방대학원에서 교육을 마쳐 인사배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물론 5·16의 핵심이었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친분이 있었고, 5·16에 참여한 군의 주축인사들과도 교분이 있었던 것도 참작이 됐을 것으로 보지만 어쨌든 내가 해군 출신이어서 도지사로 임명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해군 출신인 내가 제주도지사에 임명된 것은 어찌 보면 제주도로서도 육군이나 공군 출신 도지사 보다는 바다에서 활동하는 해군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주도 개발과정에 해군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제주도 개발에 필요한 중장비들을 육지에서 제주도로 운반해오는 것이 큰 문제였고 중앙정부의 관료들은 장비 수송문제의 어려움을 들어 제주도 개발에 난색을 보였었다.

 

특히 제주도지사용으로 배정된 관용차마저도 운반이 어려워 제주도로 보내지 못하고 서울에서 낮잠 자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도로포장용 중기계인 불도저, 컴프레서, 용접기, 롤러와 심정굴착기, 관급자재 아스팔트 등을 수송하는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해군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이상 해군의 모든 장비를 이용할 수 있도록 당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줬기 때문이다.

 

내가 제주시내 도로의 포장을 위해 중앙정부와 교섭해서 예산을 따내고 중장비를 운반하는 것을 해군LST를 이용해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진해의 한국함대 2전단 소속의 LST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미국에서 건조한 것으로 2차대전 때 사용하던 것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때 사용됐던 것이다.

 

또 제주관광산업의 발전을 위해 구입한 관광버스도 해군LST를 이용해 제주도로 운반했을 정도였다.

 

특히 한라산 횡단도로를 포장 개설할 때 필요한 어마어마한 중장비들을 모두 해군 LST로 제주항에 들여왔을 때는 구경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주항에 큰 규모의 선박이 들어 올 수 없는 이유가 커다란 암초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문제 역시 해군 특수부대인 UDT 대원 수 십여 명이 제주도에 오랫동안 상주하면서 폭파시켜 해결해줬다.

 

이후로는 제주항에 3000t급 이상의 배도 자유롭게 들어 올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제주도의 물 문제 해결도 해군이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하와이에 있던 총영사가 해군출신이었는데 제주도와 비슷한 화산섬인 하와이의 물 문제 해결방법을 내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는 심정굴착기를 이용한 지하수 관정을 통해 식수를 해결했는데 제주도에 하와이와 똑같은 방법을 적용한 결과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제주도지사에 있으면서 추진한 제주도의 도로와 물의 혁명인 도로와 물 개발에 해군이 늘 함께 해 제주도와 해군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