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운동과 대만 2·28사건은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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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5공의 철저한 탄압을 벗어난 1989년 이후 공개적으로 시작된 이 역사 평가작업에는 1980년 가해자들에게 사법적 단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됐다.

마침내 1980년 직후 광주 현지인들이나 일부 운동권 세력의 과격한 구호로만 머물던 ‘학살자 처단’이 현실 정치 속의 무거운 숙제로 대두된 것이었다.

5.18 피해자들에겐 특별법 제정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특별법 제정은 5.18 공소시효 문제로 시작됐다. 1995년 5월, 1980년 5월부터 만 15년에 해당하는 시점이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된 때문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에게 적용된 내란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성공한 쿠데타’에 대해서도 공소시효제도가 그대로 적용된다면 사법적 처벌의 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때문에 5.18 관련단체들과 야당 등은 광주항쟁의 진상 규명을 위해 공소시효를 연기하거나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는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93년 6월에는 11만5000여 명의 서명으로 ‘5.18 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에 관한 청원’이 국회에 접수됐다.

1995년 12월 20일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로 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국회에서 제정됐다.

정부는 지난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1990년, 1993년, 1998년, 2000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상신청을 받은 결과 신청자 7189명 중 5000명을 피해자로 인정해 보상했다.

1990년 7월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보상법은 관련자 및 그 유족에게 보상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토록 규정하고 있다.

대상자별로는 사망자 154명에게 170억원, 행불자 64명에게 82억원, 부상자 3193명에게 1723억원, 연행.구금자 1589명에게 299억원이 지급됐다.

안종철 박사(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는 올해 3월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재단이 제주에서 개최한 제19회 기자포럼에서 ‘제주4.3진상보고서 작성 어떻게 해야 하나’란 주제로 “이미 수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광주 5.18 관련 진행상황을 정리해 4·3진상보고서 작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가해자 부분이 제외된 피해자 중심의 보고서는 반쪽 보고서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 대만 2·28사건

대만이 2.28사건의 진상을 재조명하는 데는 50년, 한국이 5.18 민주화운동을 재평가하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1947년 2월 28일 발생한 대만인들의 폭동을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3만명을 살해했다는 이른바 ‘2.28 사건’은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4.3’과 곧잘 비견되기도 한다.

장제스.장징궈의 철권 통치에서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2.28사건은 계엄령이 해제된 1987년 이래 다시 조명을 받은 지 10년 만에 대만 정부가 진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 회복, 그리고 배상금 지급을 결정했다.

대만에서는 1989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증서를 정식으로 발급할 것인지 논란이 일었다.

2.28기념비 비문과 관련한 유가족들의 불만도 컸다. 비문에는 1947년 3월 8일 국민당 군의 대만 상륙 후 사망자들이 생겼다고 했으나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에 앞서 타살됐고 또 장제스의 사건 책임이 너무 완곡하게 표현돼 제대로 유가족들의 슬픔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등휘 총통은 1989년 11월 2.28사건의 연구와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전담기구를 구성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매듭의 실마리를 풀었다. 1992년 행정원은 사건의 책임 규명은 생략한 채 ‘2.28사건 연구보고’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2.28사건으로 인한 사망.실종자 수를 1만8000~2만8000명이라고 기록했다.

1995년 2월 28일 마침내 대북신공원에 2.28기념탑과 기념비가 건립됐다. 이등휘 총통은 정부를 대표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곧이어 ‘2.28사건 처리 및 보상 조례’가 통과돼 시행됨으로써 수난자에게 최고 600만원(한화 1억80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1997년 2월 28일, 그 동안 논란을 빚어오던 기념비문을 완성해 기념비에 부착했다. 그리고 2.28기념관을 건립해 각종 자료와 유물을 전시했다.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보조교재도 완성됐다.

‘비극의 저서’를 통해 대만 2.2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린 쩨한 라이 대만중앙대 교수는 “대만은 제주4.3과 성격이 흡사한 1947년 2.28항쟁의 아픔을 갖고 있다”며 “대만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 원동력이 2000년 민주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화의 섬 제주도 또한 작은 섬이지만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무대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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