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과 말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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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자르는 절단기는 무겁다. 그리고 차갑다. 꽃이나 나비, 그리고 나무 같은 생명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철조망뿐만 아니라 생명을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단기 앞에서 꽃이나 나비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는 절단기가 무척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다.

생명에 대한 느낌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올해 개봉한 영화 ‘워 호스(WAR HORSE)’에서 절단기가 얼마나 따뜻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이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말 ‘조이’와 주인 ‘알버트’ 간의 우정을 다뤘다.

약간의 돈을 받고 조이는 군마로 차출된다. 알버트도 말을 찾기 위해 입대한다.

영화 말미에 조이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해 있는 전선 가운데에서 철조망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된다. 철조망이 온 몸에 감긴 것이다. 그 때 영국군 1명이 백기를 들고 조이를 구조하러 나선다. 총으로 서로 죽이는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말을 살리기 위해 나선 것이다.

독일군 1명도 함께 나서 조이를 구하게 된다. 절단기가 1개뿐이어서 구조에 어려움을 겪자 독일군 1명은 동료들을 향해 절단기가 필요하다고 외친다.

이 때 독일군 진지에서 쏟아지는 절단기들. 따뜻한 가슴이 담긴 절단기들이다.

세찬 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봄날 벚꽃처럼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는 전쟁터에서 말을 살리려는 병사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이 순간 절단기가 말을 살리는 생명체 같다.

이처럼 차갑고 무거운 절단기에서도 생명의 느낌을 받을진대 사람의 말(言)에서도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말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빚 질 수 있다고 법정 스님은 말했다.

2010년 3월 법정 스님은 유언을 통해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중략)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일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고 말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말이 가슴에 무겁게 와 닿는다. 동심처럼 마음이 곱디고운 법정 스님도 이 세상에 말빚이 있었나보다.

법정 스님은 말(言)에게 생명을 부여했다. 그래서 그 생명체는 인간사의 한 관계인 빚을 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제 총선이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이들은 그동안 많은 공약을 내세우면서 말의 성찬을 유권자 앞에 차려 놓았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법정 스님의 표현대로라면 총선 후보자들의 공약도 일종의 생명을 갖는다.

발표와 이를 실현하려는 노력, 그리고 실행이라는 과정이 공약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절차가 이뤄지지 않으면 공약이라는 생명체는 당선자와 거짓말, 또는 당선자와 자기 기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몹쓸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몹쓸 자식은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빚으로 남는다.

지금 이 순간에는 총선 후보자들이 당선을 향해 날아다니느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놓쳐버리고 공약(空約)을 남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약(空約)이 엄청난 무게의 빚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자신을 짓누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박상섭 편집부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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