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강 니제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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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포수와 야수
번즈 교수는 눈이 큰 예쁜 소녀가 손가락질한 하류 남쪽 대안으로 갔다.

그곳은 우기에는 습지 또는 잡초지였으나 그때는 강유역이 모두 말라붙어 있었다.

그곳 유역에 살던 마을 주민들은 습지에서 고기를 잡고 잡초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건기가 되자 강 하류쪽으로 떠난 것 같았다.

우기에는 여섯 개쯤의 마을들이 있었고 각 마을에는 서너 가구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데, 가족의 평균 수는 열다섯 명쯤이었으므로 마을의 평균 주민 수는 쉰 명쯤이고 강유역의 습지와 잡초지 여기저기에 모두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거의 모두 유랑의 뱃길로 떠났는데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가족들이 더러 있었다.

번즈 교수는 반쯤 헐려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 넉살을 부렸다.

“안녕하시오. 이 집은 아직도 떠나지 않았네요.”

그집 안주인은 유창하게 자기네 말을 하는 이방인을 보고 놀랐으나 웃는 낯에 침은 뱉지 못하는 법이었다.

“당신은 라이카양의 어머니이시죠?”

여인은 이방인이 자기 딸의 이름을 부르자 펄쩍 뛰어올랐다. 눈이 큰 얼굴이 닮은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랬다.

여인은 아직 떠나지 않은 이유를 알려주었다.

니제르강의 가족들은 뗏목을 타고 유랑을 떠날 때 가족을 두 조로 나눠 각각 달리 떠났다. 한꺼번에 다 같이 배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면 그 집안의 씨가 마르기 때문이다. 한쪽에 사고가 나 모두 죽더라도 다른 한쪽이 씨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니제르강 유역에서는 씨가 마른 가족들이 종종 생겼다.

사실 유랑은 그만큼 위험했다. 라이카양의 가족도 어머니와 장남, 조카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라이카양의 어머니는 이방인 손님에게 점심을 대접했는데 뜻밖에도 하얀 쌀밥이었다. 니제르에서는 고급 호텔에서나 먹을 수 있는 고급요리였다.

“쌀 농사를 지었느냐고요?”

여인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농사를 지어 얻은 것이 아니라 자연산 벼를 그저 벤 것이었다.

니제르강 유역에는 그런 늪지가 많았으며 주민들은 불로소득을 얻었다.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늪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다. 언제 물이 빠지고 언제 물이 넘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얀 밥 위에 간장에 절인 고기가 얹혀 있었는데, 번즈 교수는 일본에서 그 요리를 먹은 일이 있었다. ‘우나기 돈부리’(장어덮밥)였다. 일본에서도 고급요리에 속했고 아주 맛이 있었다.

뜻밖의 진미에 번즈 교수는 감탄했다. 그는 염치없게 한 그릇을 더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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