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과 한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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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서임권 논쟁의 두 축이었던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황제인 하인리히 4세 사이의 권력투쟁은 팽팽한 긴장 속에 진행됐다. 하인리히 4세에게서 맹렬한 비난의 서한을 받은 그레고리 7세는 1076년에 개최된 시노드에서 하인리히 4세(황제:독일과 프랑스를 통치함)를 파문했다.

그리고는 바로 그레고리 7세는 카노사 성으로 가버렸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으로 가서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참회자의 복장을 한 채 맨발로 꿇어앉아 참회하고 파문의 철회를 청원했다. 맹추위 속에서 3일씩이나 맨발로 꿇어앉은 하인리히 4세에게 그레고리 7세는 파문의 철회를 선언했다.

그러나 파문의 철회로 힘을 얻은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를 체포해 살레르노로 유배시켰고, 이 충격으로 교황은 1085년 5월 25일 유배지에서 한(恨)서린 종말을 고했다.

지난 14일 저녁에는 서울 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촛불 시위가 있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을 항의하는 시위였다. 보도에 따르면, 전국 60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된 시위에는 60여 만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시위가 시민의 자발적 참여라고 하지만 시위를 통해 요구했던 내용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직접 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된다는 요구도 시위 현장에서 만만치 않았음을 C방송은 보도했다.

그러나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역시 정부끼리 마주 앉아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미국 또한 그럴 의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부시는 시위 이전에 이미 간접 사과에 이어 직접 사과까지 한 상태이다.

장갑차 사고로 숨진 여중생들의 명복을 빌면서 그 부모님들께는 깊은 위로를 드린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시위를 통해서 얻어낸 것에 너무 흥분해 하지 말고, 그로 인해 상실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이다.

우리의 요구대로 부시가 직접 와서 무릎을 꿇고 SOFA도 우리의 요구대로 100% 개정되고 또 미군 철수의 요구까지 관철될 경우, 이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국민 중 몇 %나 될 것인가. 극단적으로 미군이 철수한다면 통일은 아주 쉽게 될 것이다. 민족주의로 위장한 좌익세력은 축제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절대 다수 국민을 헤어날 수 없는 불행의 함정으로 빠뜨린다는 엄연한 사실은 너무 분명한 일이다.

한편 미국민들을 슬그머니 살펴보자. 자기 나라 대통령이, 자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안보를 담당해주고 있는 나라에 불려 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6.25 한국전쟁 때 4만5914명이 전사했으며 7140명이 포로로 잡혔고 그 중 2700명이 죽었다. 또한 엄청난 전쟁 비용을 부담했으며 천문학적 원조를 했다.

그런데 이토록 막무가내로 몰아붙인다면 이를 보는 미국민의 정서는 어찌할 것인가. 결코 보복 차원이야 아니겠지만 수천 t의 제주 감귤을 궤양병 판정으로 전량 반품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당 지원이 제소돼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20대 청년 3명이 지하도에서 미국인(사복 차림의 군인)을 집단 폭행하고 흉기까지 휘두른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카노사의 굴욕을 되새겨 볼 때이다. 한 순간 그레고리 7세는 승리한 것 같았지만 불과 10년도 못 되어 살레르노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주스러운 회한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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