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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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리더십의 '서민 대변인' 표상

마지막 순간까지 숨가쁘게 진행된 대선레이스. 결국 국민들은 ‘낡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서민 대통령’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선택했다.

신뢰와 원칙에 기반을 둔 탈권위주의적 수평적 리더십을 원하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정계에 입문한 지 14년이 됐지만 국회의원으로 있던 기간은 5년10개월에 불과하다.

노 당선자는 고교 졸업 후 한때 막노동을 하면서 고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10년 만에 고졸 출신으로 그 꿈을 이룬다.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아스팔트 변호사’로 변신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다. 이를 토대로 국회에 입성한 노 당선자는 5공 청문회 때 ‘인기 스타’로 급부상하지만 늘 튀는 언행으로 각종 시비에 휘말리는 등 정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처럼 노 당선자는 일용노동자, 어망회사 직원, 판사, 운동권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을 넘나들었다.

스스로 ‘서민 대변인’이라고 밝히는 노 당선자에게 기득권이 난무하는 낡은 정치 타파를 원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이회창 대세론’ 등으로 당초 힘들 것으로 예상했던 승부를 뒤엎고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노 당선자는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빈농의 집안에서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모친은 45세 때 노 당선자를 낳았다. 어린 노무현은 6세 때 천자문을 뗐을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별명은 ‘돌콩’이었다. 키는 작았으나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3년 노 당선자는 진영대창초등학교에 들어갔다. 1학년 때 성적은 급우 67명 가운데 2등이었다. 평가란에는 ‘교과 성적이 우수하고 특히 발표력이 있음. 대단 쾌활, 통솔력이 있어 급우 선도의 자진 노력이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5~6학년 시절의 평가란에는 ‘성인답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노 당선자의 학교생활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결석이 많았던 이유다. 1~6학년 사이 32일, 38일, 30일, 36일, 18일, 17일씩 학교를 빠뜨렸다.

변론부 부장을 맡은 6학년 때, 노 당선자는 담임 교사의 권유로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노 당선자는 어릴 적부터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여간해선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 리더십이 있어 동네 아이들을 곧잘 끌고 다니면서 대장 노릇을 했다.

노 당선자는 “잘 사는 읍내 출신과 가난뱅이 시골 출신으로 패가 갈리기도 했는데 나는 항상 시골 출신의 중심이 되곤 했다”고 술회한다. ‘서민 대통령 후보’를 자임하는 현재와 겹치는 모습이다.

노 당선자는 1959년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우여곡절을 겪는다. 입학금이 없어서였다. 그러다 ‘입학 때는 책값만 내고 입학금은 농사를 지어 갚는다’는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찾아간다. 그러나 교감은 안된다고 잘랐다. 교감은 어머니에게 “큰아들(당시 노 당선자의 큰형은 대학 졸업 후 집에 있었다)은 대학 나와도 저렇게 백수건달 아니냐”고 했다. 이에 설움에 북받친 어머니가 펑펑 울자 노 당선자는 입학원서를 북북 찢어버린 후 “집에 갑시다. 나 이 학교 안 다녀도 좋소”라며 뛰쳐나왔다. 그런 노 당선자에게 교감은 “저 봐라. 저런 놈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큰형은 다음날 학교를 찾아가 교감에게 비교육적 발언을 문제삼겠다고 항의했다. 결국 교감은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고 노 당선자는 중학생이 됐다.

노 당선자는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3때 성적은 전체 504명 중 14등이었다. 장래 희망은 ‘은행원’으로 기록돼 있다. 졸업 후 농협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어망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가 월급이 너무 적어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울산에서 잠시 막노동도 했다.

노 당선자는 고향 산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큰형과 작은형은 각각 1967년과 1968년에 5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모두 세무공무원이 되면서 집안 형편이 풀렸다.

고시공부 과정에서 입대 영장이 나왔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강원도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 제대 후 다시 고시 공부를 하면서 같은 마을에 살던 현재의 부인 권양숙씨(55)와 연애를 했다. 권씨는 부산 계성여상을 중퇴했다. 양가가 모두 결혼을 반대했다. 노 당선자 집에선 권씨 아버지의 좌익활동이 문제가 됐다. 처가쪽에서도 고시 합격이 불투명한 노 당선자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데 반대했다.

하지만 권씨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결국 1973년 결혼식을 올렸고 넉 달 뒤 아들이 태어났다.
혼인신고는 2년 뒤인 1975년 고시에 합격한 뒤 아들의 출생신고와 함께 했다.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 당선자는 상고 졸업생이어서 화제가 됐다. 사법연수원의 성적은 60명 중 47등이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 만에 변호사로 뛰어들었다.

1978년 부산에서 개업한 노 당선자는 조세 소송을 많이 맡았다.
1981년 부산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구속된 ‘부림(釜林)사건’의 변호를 맡은 것이 노 당선자의 인생 행로에서 전환점이 됐다고 노 당선자는 말한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부산요트클럽협회 회장을 지낸 노 당선자는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다. 현대그룹, 통일중공업, 한국중공업 등에서 일어난 노동쟁의 형사사건을 맡았다. 공해문제연구소를 열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린다. 노 당선자는 1987년 옥포의 대우조선 노사분규와 관련해 숨진 이석규씨의 장례식 사건 때 ‘제3자 개입’,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21일 만에 풀려났지만 11월에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는다.

이 같은 ‘투쟁’을 통해 노 당선자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진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당선됐다. 그 해 말 ‘5공 청문회’에서 노 당선자는 스타로 탄생했다. 아마 13대 국회에서 5공 비리 청문회가 없었으면 정치인 노무현은 ‘다소 튀는 언행을 하는 그렇고 그런 정치인’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점 울산 현대중공업의 집회 현장에서 한 발언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신문들은 노 당선자가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연설한 것으로 보도했다.

당시 제도권 정치에 한계를 느낀 노 당선자는 1989년 3월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데 국회가 무슨 소용이고 국회의원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의 의원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17일 만에 사퇴 의사를 철회했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석을 향해 명패를 집어 던지는 돌출적인 행동도 보인다.

1990년 1월 노 당선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한다. 당시 3당 합당이 이뤄졌을 때, 정치적 명분이 없다며 거부했다. YS를 ‘변절자’,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꼬마 민주당’에 남은 노 당선자는 DJ(김대중)가 이끄는 평민당과 야권 통합에 참여했고,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노무현 당선자가 정계에 입문한 지 14년이 됐지만 국회의원으로 있던 기간은 5년10개월이다. 부산에 지역구를 가졌던 노 당선자가 YS와 헤어진 대가는 컸다. 1992년 14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와 1996년 15대 총선(민주당.서울 종로)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김해가 포함된 부산 북.강서.을구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오늘의 노 당선자를 있게끔 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이때 결성됐다. 정치인 노무현의 ‘무모한 도전’은 국민에게 뚜렷하게 각인되면서 그의 이미지에 결정적 보탬이 된다.

노 당선자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해양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언론 세무조사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에는 “언론과의 전쟁 선포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언론 세무조사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에서 당내 대권 주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정부를 옹호하고 나섰고, 이는 동요하던 민주당 지지층에게 ‘대안’의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노 당선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고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노 당선자의 삶을 보면 현재의 실패가 미래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된 경우도 많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랬다. 어렵게 국민 경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후보 등록을 코앞에 두고 극적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내 ‘국민 후보’가 됐다.

노 당선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과거에 어떠한 길을 걸어왔나’보다 ‘앞으로 어떤 비전을 세우고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결국 당내 불협화음과 의원 탈당사태에도 꿋꿋이 후보로서 행보를 지속했던 노 당선자가 절반 가까운 이회창 후보의 지지층을 끌어안고 국가가 처한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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