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도 양보했던 선비정신
대제학도 양보했던 선비정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조선왕조 500년은 선비정신으로 버텼던 나라였다. 여러 차례 국난을 당했고, 임진·병자의 양란에는 사실상 국가가 망하기 직전에 이른 참혹한 형편의 나라였다. 그러나 망하기 직전의 나라는 다시 살아나 무려 500년의 긴 세월을 견뎌냈다.

그렇게 버텨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하나만 든다면 바로 조선 민족의 선비정신이었다. 국난에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건져 내겠다던 선비정신, 자신의 몸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선비정신,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아도 한 가닥 양심과 도덕성 만은 버리지 못한다던 선비정신, 모두와 함께 살고 기쁨과 슬픔도 남과 함께 나누자던 선비정신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었고 나라가 그 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때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류층의 지성인들은 오늘처럼 돈 만을 위해서, 권력 만을 위해서 염치코치 없이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 만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자기 만이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자기 만이 가장 훌륭하다고 떠들면서 남은 모두 자기 아래로 보는 그런 몰염치한 사람이 오늘처럼 많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학식이 높고, 인격이 훌륭하고, 덕행이 높은 사람에겐 아무리 큰 벼슬이나 이권까지를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지닌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상대방을 깎아 내려야만 자기가 올라가고,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칭찬하면 자신이 추락된다는 요즘의 그런 논리를 지니지 않은 선비들이 그 때는 그래도 있었다. 그것이 조선의 힘이었다.

조선시대의 그 때로 가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선조 원년(1568) 8월 초하루의 기사에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는 기록이 있다.

‘이황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 이때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제가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자리를 바꾸어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이황도 힘껏 사양하여 오래지 않아 다시 벼슬이 교체되어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다’라는 조선 선비정신의 본체를 나타낸 기록이 있다. 500년 조선사에 아름답고 멋진 역사의 한토막이다.

정승의 지위보다야 아래지만, 세상에서 알아주고 높이 여기는 벼슬이 대제학이었다. 그런 벼슬을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선비 정치가 박순의 아름다운 행위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미화할 수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알던 선비 퇴계 때문에 박순은 바로 대제학에 오르지만, 이런 사양과 양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비정신인가.

수십억을 공천 헌금으로 상납하고라도 결단코 국회의원을 해야겠다는 사람, 친구고 선배고 스승이고를 무시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만이 고관대작이 되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과는 그때의 선비들은 분명히 달랐다. 나만이 대통령 자격이 있지, 다른 어떤 사람도 대통령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결코 양보 없이 끝까지 완주해야 되겠다는 요즘 사람들과는 그 때의 선비들은 많이 달랐다.

온 세상이 후보 경선으로 자기만이 최고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세상, 사양하고 양보해서 진짜 선비가 후보로 선정되어 국민의 심판을 받는 그런 미덕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 사암 박순의 아름다운 양보가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이유는 무슨 이유일까. 대제학을 양보하니, 다시 또 대제학이 되돌아왔던 그 때 일이 잊히지 않음은 웬일일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