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주(筆誅)처럼 무서운 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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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지난 달 10월 17일은 유신 독재가 선포된 40주년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26일은 10·26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날이자 유신 독재가 끝나던 3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40년과 33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안타까움과 처량한 탄식만 나올 뿐, 그 긴 세월에 우리의 삶이 보람된 생애였다는 아무런 징표도 없으니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4·19를 고등학교 때 겪었고, 대학에 들어와 6·3 한·일 회담 반대 투쟁으로 날을 세웠으며, 그런 와중에 ‘신망 잃은 박 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라는 최초의 하야 권고 시위로 확대되면서 첫 번째로 학생의 몸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오래지 않아 풀려났으나, 1965년에는 한·일 협정 비준 반대로 싸우며 월남 파병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두 번째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몸이 풀려나오자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기다리기에 강원도 전방에서 3년 세월을 국토 방위로 젊음을 보냈다. 1968년에야 제대하여 그해 가을에 재입학으로 다시 대학생이 됐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의 시국에 또 기웃거리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대학 교수가 되려고 몸을 굽히고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있을 때, 마침내 1972년 영구 독재가 완전무결하게 자리 잡는 유신이 선포되고 말았다.

나의 모교 전남대학교에서는 마침내 그해 12월 초 유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함성’이라는 지하 신문이 학교와 시내의 곳곳에 뿌려지는 쾌거가 일어났다.

죽음을 각오한 내 후배 대학생들이 일으킨 거사이자 의거였다. 1973년 3월 초까지 의거의 주동자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들은 또다시 ‘고발’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려다 끝내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뚜렷한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지방인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며, 일체의 보도가 관제된 탓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사이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학교에서 잡혀가 경찰국 공작분실의 지하에서 숱한 고문과 강압에 의해 ‘함성’과 ‘고발’을 제작하여 국가 반란을 예비 음모한 수괴로 둔갑되고 말았다.

내가 잘 알고 지내던 동지이자 후배들이 했던 일인데, 나를 지령한 수괴라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기소하고는 1973년 연말까지 독방의 감옥에 처박아 그해 내내 법정에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해 연말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소했다. 검찰은 상고했고, 1976년에야 상고의 기각으로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고, 1975년 긴급 조치가 마구 발동되면서 나의 삶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생을 이어가야 했다.

생사람 잡아다가 고문으로 간첩도 만들고 역적으로도 만들어 인생을 파탄시키고, 통치자 한 사람만 천하의 자유를 누리며 그의 추종자들만 한세상 만났다고 삶을 구가하던 시절이 유신 독재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40년이 흘렀고, 그 종말을 고한지가 33년이 지났는 데, 이직도 그런 과거사가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런 기막힌 세상이 지구의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세상에 무서운 것은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만이 승자가 된다. 시간이야 아무리 지연되더라도 결코 역사적 정의와 진실만은 묻히지 않는다. 역사에 맡기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 역사란 어떤 것인가. 역사에 기록되는 진실과 정의가 바로 춘추필법이다.

진실과 정의의 힘은 모든 권력과 역사를 뒤엎을 수도 있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무서운 필주(筆誅)를 내리기도 한다. 역사는 세월이 지났다고 관대해지지 않는다. 필주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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