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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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창 밖에 있는 마른 나무의 앙상한 가지에 달랑 몇 개 안 남은 누런 잎사귀가 책상 위의 낱장 달력과 오버랩되면서 아쉬운 한 해의 마지막 자락에 기별을 고한다.

매년 이맘때면 그랬듯이 역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도 지난 일 년 동안의 기억들이 옴니버스 활동사진처럼 머리 속을 휘~익 지나간다.

나무 밑동에 무심하게 쌓인 저 낙엽들이 지나간 시간과 세월처럼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온다.

희망찬 새해 설계도 해보면서 한 해를 보내곤 했는데, 유독 올해에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회에 젖는 이유는 중년의 나이에 들은 때문인가….

지난 1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메모장에 가까운 일기장을 꺼내 보았다.

음…봄에 이런 일이 있었군…결혼식이 참 많았군…여름, 흠 바닷가에는 한 번도 못 갔군, 코앞이 다 바다인데…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애구! 홍수 대피해 해마다 이래야 되나…가을, 이건 불과 엊그제 같으니까 새로울 것도 없고…지금 한겨울, 며칠 있으면 새해….

이렇게 지난 일 년 동안 필자의 주변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특별하게 한 일이 없다고 끌탕만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선배 교수님이 “아이고, 이 사람아! 이집트, 터키, 그리스 박물관 탐방도 했고 개인전을 비롯해 각종 그룹 전시회도 많이 했고 거기다 봉사활동도 했고 그러면 됐지, 무엇이 그리 아쉽다고 하나?”라고 일갈한다. 애구 다른 것보다 봉사활동이라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좋은 일 좀 해본답시고 하느라고 해봐야 겨우 한 번밖에 못 했는데….

그래도 역시 일 년 동안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하니 그 어떤 일보다 제일 가슴 뭉클하게 남는 일이 고작 한 번뿐이었지만 봉사활동인 것 같다.

부끄러운 마음에 봉사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기 어렵지만, 평생 직업인 그림 그리는 일에서조차 가끔씩 허무할 때가 많았고,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고 강의실을 나올 때마다 과연 충실했는가, 항상 모자람 속에 후회가 많았으며, 여러 가지 일상에서도 항상 모자람과 회한이 많이 남았는데, 남을 위해 사랑을 베풀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이것은 진짜 가슴 벅차고 오래 남는 기쁨인 것 같다.

불교에서는 보시라고 해서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나서도 무심하라고 했는데, 베풀었음을 전혀 의식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필자는 마냥 기분좋은 걸 어떻게 하나, 좋은 건 좋은 거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고…그 속에 새로움이 있고 희망이 있다.

새해에는 이렇게 혼자만 느끼기엔 너무나 아까운 여러 가지로 보람찬 봉사활동을, 많은 학생들도 같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도 나누고 몇 배로 증폭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벌써 마음에 봄이 오는 듯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 갑자기 파랗게 물이 오르는 것 같다.

마지막 잎새가 방긋 웃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자기가 떨어지더라도 좋은 흙으로 변해 그 나무에 더욱 빛나는 잎사귀를 달아준다는 것을 아는 듯….
아, 한 해를 보내며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마지막 남은 저 잎새가, 새해에 나에게 할일을 이야기해주는구나. 마지막 잎새, 그것은 창조적 삶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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