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으로 본 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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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순종의 양처럼 다툼없는 한 해를"


우리나라에서 양에 대한 기록은 언제부터 나올까?

농경민족인 우리 민족과 양은 친연성이 없어선지, 그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다. 게다가 실제로 양(羊)은 ‘면양(綿羊)’을 가리키는데, 염소인 ‘산양(山羊)’과 구별없이 기록돼 왔다.

우리나라에서 양에 대한 기록은 삼한(三韓)시대부터 나온다.

중국 후한(後漢.AD 25~219)시대 ‘석명(釋名)’이란 책은 삼한지방에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존재한다고 기록했고, 주(註)에 ‘사람들이 육포를 섭취한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일본 법왕 1년(599년) 백제에서 낙타 1마리, 나귀 1마리, 양 2마리, 흰꿩 1마리를 보냈고, 신라 헌덕왕 12년(820년)에는 검은 수양 2마리, 흰양 4마리, 산양 2마리, 거위 1마리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때 양은 외교사례품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에만 양 관련 기록이 29건 나온다.
고려 현종 9년(1018년) 2월의 것이 첫 기록이다. “경목감(京牧監)에서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놈이 있다”고 적혀 있다.

정종 4년(1038년) 11월 개성 근처에서 산양(山羊)을 사육했으나 사료가 많이 들어 섬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선종 5년(1088년) 12월, 의종 8년(1154년) 6월에는 요나라(혹은 금나라) 사신이 양 2000마리를 고려에 가져왔으며, 예종 11년(1116년) 4월에는 요나라 유민이 투항해 양 200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충렬왕 20년(1294년)엔 원나라 쿠빌라이가 죽자 왕이 양 10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냈으며, 충렬왕 23년(1297년) 2월 원의 황후가 충렬왕의 생일 선물로 양 40마리를 보낸 기록이 보인다. 공양왕 3년(1391년)엔 중국과의 양 무역거래 기록이 나타난다.

양은 제물이나 외교 선물로 매우 진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고려 후기 몽고의 마(馬)목장이 들어서면서 사육이 늘자 무역품으로도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에서 양이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렬왕때 몽고식 목장이 개설되면서부터로 보인다. 양은 유목민의 기본 가축으로, 말과 함께 제주에 들어왔다.

몽고는 충렬왕 2년(1276년) 몽고식 목장을 개설하고, 충렬왕 26년(1300년)까지 목장 관리.감독을 맡은 동.서 아막(阿幕) 체제를 정립, 이곳 목장에서 양을 사육했을 것으로 보인다. 몽고는 충렬왕 3년(1277년) 양과 함께 소, 낙타, 나귀 등 5축(畜)을 수산평에 방목해 길렀다. 이에 따라 제주에는 말목장 외에 소를 키우는 우목장(牛牧場), 양을 기르는 양잔(羊棧) 등이 설치된 것으로 주장된다(남도영의 ‘제주도목장사’).

이렇게 길러진 양은 고려 왕실에도 바쳐졌다. 그 기록이 ‘고려사’ 공민왕 12년(1363년) 12월에 있는데, 탐라의 한 만호(萬戶)가 양과 말을 바쳤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양목장(羊棧), 돼지목장(猪圈), 염소 동산(羔口안에有), 사슴목장(鹿場) 등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 목양조에는 양을 기르던 ‘양잔’이 3곳 나온다. 제주목 사라봉 남쪽에 있는데, 털을 얻어 진상마를 장식하는 데 썼다고 기록됐다. 대정현과 정의현은 사창(司倉) 가운데 1곳씩 있다고 적혀 있다.

제주에서 면양이 산업으로서 육성된 것은 1960년대였다. 아일랜드 출신 맥그린치 신부가 뉴질랜드에서 번식용 면양을 도입해 사육한 게 시초였다. 1970년대 초 2800마리를 키울 정도였으나, 호주.뉴질랜드산 양모 수입에 밀려 사양산업이 됐다. 1995년 이시돌목장의 양 300여 마리가 강원도 대관령으로 팔려갔고, 지금 그곳에서 사육되고 있다.

2002년 12월 현재 제주에는 25마리의 관상용 양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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