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과 제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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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 아젠다(議題) 설문 결과, 역대 정권이 제주를 일구어온 역사를 바라보는 도민들의 시각이 변방의 시각이 아닌 중심의 축으로서 새롭게 교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분야 뿐만 아니라 인구 등에서 전국의 1%라는 수사적 개념이나 더부살이 관념에서 벗어난 동북아시대의 당당한 한 축으로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대 대통령과 제주의 인연’에 관한 도민 설문 결과를 중심으로 역대 정권의 제주 발자취를 짚어본다.

▲이승만
도민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제주의 인연으로 제주별장(파라다이스관광호텔, 송당목장)과 4.3사건을 가장 많이 꼽았다.

△4.3사건=1948년 4월 3일 제주 중산간 오름에 일제히 타오른 봉화를 신호로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6개월 동안 제주 전역은 4.3의 악령에 시달려야 했다.

‘4.3’은 좌.우익 대결구도에서 무고한 양민이 무수한 인명 피해를 당한 사건으로 비화돼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됐다.

△송당목장=이 대통령은 1957년 5월 23일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국립 송당목장 건설계획을 밝히면서 “우리 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밝혔다.

4개월 후 송당목장은 육우 168마리가 도입됨에 따라 정식으로 국립 제주목장으로 발족된다.

국내 최초로 브루셀라가 발병한 진원지이기도 한 송당목장은 이 정권의 부침과 함께 귀빈들의 시찰코스로 유명세를 탔지만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5년 만에 국립 간판을 내리고 민간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파라다이스호텔(서귀포관광호텔)=이 대통령은 외화 획득 목적으로 건교부가 직영하는 국영 관광호텔 건립을 추진하는데, 서귀포시내 해안 절경과 섶섬, 문섬이 눈앞에 펼쳐진 서귀포관광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이 바로 그 곳이다.

1965년 여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장이 이 호텔에 묵을 당시 냉방시설이 없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린 나머지 시설문제를 호통친 후 얼마 안 있어 민간불하계획이 발표됐다는 후문이 있다.

▲박정희
도민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제주의 인연으로 5.16도로, 어승생수원지 건설, 제주도 개발, 신제주 개발, 중문관광단지 조성, 감귤산업 육성, 제주축산업 활성화 등을 꼽았다.

△5.16도로 포장=1962년 3월 23일 역사적인 5.16도로 기공식에 이어 1963년 10월 11일 제주시~서귀포시 43㎞ 구간에 대한 개통식이 있었다.
개통식은 5.16후 처음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를 5일 앞두고 치러졌는데 서귀포시민들에게는 축제 그 자체였다. 5.16도로명은 제주도가 공모를 통해 명명했다.

△어승생 수원지=어승생 수자원 개발계획은 1964년 3월 초도 순시차 내도한 박 대통령이 중산간지대 용수 개발 추진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제주도를 하와이 못지않게 개발, 동양의 하와이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10만6000t 규모의 어승생 수원지는 태풍으로 인한 함몰현상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4년여가 지난 1971년 10월 모든 공사를 완료했다.

▲전두환
도민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제주의 인연으로 대통령 경호기 한라산 추락사건, 소년체전 제주 개최 등을 꼽았다.

△대통령 경호기 한라산 추락사건=1982년 2월 6일 국방부는 “5일 하오 3시께 제주도 지역에서 대침투 작전 훈련중이던 C123군용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 이 수송기에 타고 있던 육군과 공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했다”고 밝혔다.

이 사고의 비행기는 6일 예정된 전 대통령의 제주 연두순시에 대비해 외곽 경비를 맡을 장병들이 탔던 군용기로 확인되고 있다.

△제13회 전국소년체전 제주 개최=1984년 5월 25일 제13회 전국소년체전이 제주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이 대회는 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개최됐는데 도민들이 소년체전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모금운동을 펼친 결과 성금 금액이 자그마치 70억원에 이르렀고 1년의 체전 준비기간 경기장 시설 등에 270억원이 투자된 것으로 집계됐다.

▲노태우
도민들은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소 정상회담,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서귀포88체육관 등을 제주와의 인연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소 정상 제주회담=1991년 4월 20일 제주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상회담의 상대자는 당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일으키고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어서 세계 언론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두 정상은 이날 제주신라호텔에서 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냉전 종식을 위해 북한의 개방 등 필요한 노력을 양국이 공동으로 촉진하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 협정에 가입, 국제 사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북한의 유엔 가입 문제를 논의했다.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역인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가 탈냉전시대 평화의 섬으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제주도개발특별법 날치기 통과=1990년 11월 7일 제주도개발특별법에 대한 도민들의 거센 반대시위와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회원 양용찬씨의 분신사건으로 특별법 정국은 파국에 휩싸인다.

법 제정에 대한 찬반 양론에 따른 도민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와중에 1991년 12월 18일 여당의 심야 날치기로 이 법은 통과된다. 이듬해 총선에서 특별법 처리가 현안으로 대두돼 여당 후보 전원이 참패하고 만다.

▲김영삼

△한.미 정상회담, 한.일 정상회담=1996년 4월 16일 노란 유채꽃을 배경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한반도 4자회담 제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어 김 대통령은 6월 23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제주에서 갖고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위해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소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 대통령, 하시모토 일본 수상의 정상회담이 또 다시 제주에서 개최돼 제주는 정상회담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주가 대통령의 단순한 휴양지에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 각인되기까지 역사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도민의 저력이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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