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바라본 제주 - 맥그린치 금악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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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 호스피스병동 운영위한 음악회에 도민 정성 필요"


2003년, 파란 눈에 하얀 금발의 신부는 49년째 제주에 살고 있다.
그 49년 동안 오직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아 왔다. 그리고 기력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이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1953년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당시 25세의 혈기 왕성한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75)에게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에서 봉사를 하라고 명(命)했다.

이듬해 4월 한림에 도착, 교회는 물론 머물 숙소조차 없어 기숙하게 됐다.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던 한국에서도 너무나 궁핍했던 제주도, 남들과 같이 보리밥과 김치를 먹으며 한림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1957년 본당 신자인 15세 소녀는 부산에 일하러 갔다가 싸늘한 시체가 돼 돌아왔고 맥그린치 신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부산의 공장에서 일하는 제주 처녀들이 일본에 밀항 간 제주 청년들의 노예처럼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국 아일랜드에 있는 가족, 친구, 동창들에게 돈을 보내 달라고 매일같이 편지를 보냈다.

돈이 오는 대로 돼지를 사고 돌투성이였던 금악리의 땅 3000평을 샀다. 사람을 모으고 4-H클럽을 결성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성이시돌목장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돌투성이 땅을 목장 초지로 만들겠다는 젊은 신부는 ‘미친 사람’으로 몰리기도 했다. ‘일본(일제)도 이곳을 초지로 조성하지 못했다’는 노인들, 돌투성이 땅을 산다기에 ‘내 것도 사 달라’고 조르던 지주들, 선교하러 간 줄 알았던 아들의 ‘갑작스런 돈 타령’은 부모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농민들과 함께 손으로 돌을 날라 초지를 조성했고 양을 사고 젖소를 샀다.
양과 젖소를 키우는 기술을 전수할 자원봉사자를 아일랜드에서 모집했고 양털 스웨터를 잘 짜는 골롬반 선교회 수녀님들을 모셔왔다.

양털 스웨터를 생산하기 위해 한림수직사를 세웠고 한림에 사는 처녀.주부 1200명은 뜨개질로 돈을 벌었다. 처녀들은 돈을 모아 시집을 갔다.

1957년의 중대한 결심은 이뤄졌고 더 큰 꿈을 세워 농촌지역에 성이시돌양로원과 유치원 2곳을 지었다. 모두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이곳을 개방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성이시돌복지의원에 무료 호스피스병동을 신축했다. 말기암과 불치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편안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맥그린치 신부는 주저없이 “무료 호스피스병동을 운영하기 위해 도민들의 정성이 필요하다”며 “성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성이시돌회관에서 빙고게임을 개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손을 내미는 것은 아직도 몸에 배어 있지 않다”며 “음악회와 빙고게임을 열고 성금을 모으는 아일랜드의 정서를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고 미소를 지었다.

제주의 장래에 대해 “1950년대의 제주와 지금의 제주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보였다”며 “단, 도민 모두 잘살 수 있는 국제자유도시가 되기 위해선 자연과 조화를 이룬 발전과 제주 고유의 풍습.문화를 소중히 보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특히 개발만을 위해 대기업이나 외국 자본에 제주의 모든 것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진 것 없고 소외되고 몸이 아픈 이들을 위해 살았던 20대의 맥그린치 신부는 어느덧 고희를 넘긴 노인이 됐지만 순수한 열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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