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좌수 의거비'...일제 수산자원 침탈에 맞서 민중이 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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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3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 체결 이후 일본인들의 불법 조업은 합법적인 입어 행위로 전환됐다.

일본인들이 제주 바다를 본격적으로 침탈하면서 어민들은 생존권에 위협을 받게 됐다.

1887년(고종 24년) 일본 잠수기선 14척이 가파도 일대 바다에서 해산물을 약탈해 갔다. 이 가운데 어선 6척은 가파도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전복을 노획했다.

선원들은 또 모슬포에 상륙해 민간의 돼지와 닭을 빼앗아 갔다. 가파도는 식수 사정이 좋지 않아 이들은 모슬포항 인근 용천수인 ‘신영물’에서 물을 퍼갔다.

신영물은 모슬포 주민의 식수원이자 빨래터로 부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이들이 물 긷는 아녀자들을 능욕하려들자 이에 격분한 이만송, 이흥복, 정종무, 김성만·성일 형제 등 5명이 주도로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속칭 ‘돈지’ 해안가에서 격투를 벌였다.

칼(일본도)로 무장한 40여 명의 선원들에 맞서 이들은 몽둥이로 응징하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이만송은 칼에 맞아 숨졌고, 김성일은 손가락이 잘렸다. 마을 하인 1명은 팔이 잘려 나가는 등 희생이 따랐다.

사건이 알려지자 관에서는 이들의 용기를 포상하기 위해 좌수(座首)의 벼슬을 내렸다. 5명에게 좌수 직을 주면서 훗날 ‘오좌수(五座首)’의 내력이 됐다. 이름 모르는 하인에게는 벼슬 대신 하사금 30냥을 내렸다.

심현택 제주목사는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통리교섭통상아문(統理交涉通商衙門)으로 하여금 일본 공사에 항의하도록 조치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모슬포청년회의소는 ‘오좌수 의거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120여 년 전 관군(官軍)도 나서지 못했던 역할을 약소국의 백성으로서 목숨을 걸고 실행했던 거룩한 행동을 후세에 영원히 기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는 대정읍 하모리 신영물 가에 세워졌는데 이후 도로 확장 등으로 비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2009년 원래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변으로 옮겨 세웠다.

오좌수 의거비는 일본 어민들의 제주 수산자원 침탈에 맞서 도민들의 생존을 위한 자주적 항거의 사례를 보여주는 기념비로 꼽히고 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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