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지정기록물과 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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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열람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모적인 논쟁이 공개가 엄격히 제한된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더욱이 국회 의결로 열람을 허용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증발되면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중 누군가에 의해 불법으로 열람됐으며 빼돌려졌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시대 왕조실록은 당시 왕 조차 왕조실록을 살펴보지 못했고 수많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해 온 수 백 년 전의 과거 상황과 비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에 따르면 왕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기록하는 사관과 자신의 행동거지가 어떻게 쓰여 졌는지 궁금해 하던 왕이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태종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지자 사관이 이를 알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음에도 사관은 이 마저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전해지고 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려하자 우의정 맹사성이 임금이 이를 보면 후세 임금이 실록을 고치려 할 것이고 사관은 임금이 볼까봐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진실을 전하겠느냐고 이를 거부했던 사실이 세종실록에 기록됐다.

맹사성의 말 대로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이 없게 된다.

<실록>의 기초자료인 사초(史草)도 열람이 금지되었다.

사초에는 사관이 국왕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입시(入侍) 사초와 정리하면서 평가를 적은 가장(家藏) 사초가 있다.

이 사초가 연산군 때 정쟁거리가 된 적이 있다.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했으나 제대로 보지 못했고 중종 역시 실록을 열람하려 했지만 사간원의 반대로 성사돼지 못했다.

하지만 <실록>은 기록자의 주관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고 수많은 당쟁으로 인해 세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윤색은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북인세력이 주도해 편찬했던 <선조실록>과 서인이 주도해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이 있고 남인이 주도한 <현종실록>과 서인이 주도한 <개수실록>이 있으며 <숙종실록>에 대해 소론은 <보궐정오>를 덧붙였고 <경종실록>에 대해 노론은 <수정실록>을 따로 편찬했다.

다행히 앞 기록을 없애지 않고 남겨두었다. 엇갈린 기사, 주관성이 짙은 기사도 종합·비교하고 행간을 읽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진실 파악에 도움이 된다.

문제는 아예 기록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재위기간이 24년이었던 <정조실록>이 54권 56책이었던 것에 비해, 재위기간이 합쳐서 64년이었던 순조·헌종·철종 기간의 실록이 모두 65권 54책이었다. 기록 분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검찰입회하에 5년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던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5년만에 증발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그것도 2012년 대선에서 문제의 대화록을 인용해 상대방 후보를 정치적 공세까지 했다는 의혹마저 일고 대선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국가정보원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화록 발췌본을 불법으로 공개해 국제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말이다.

여야는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국정조사에 합의하고도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열람하려다 증발된 사실을 확인하고 검찰수사다 특검수사 하고 딴소리 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

이를 지켜 보는 국민은 이 장마와 무더위에 짜증을 더하고 스스로 창피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절대왕정마저 못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다.

<강영진 정치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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