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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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장
노산 이은상, 현대시조 개척의 선구자다. 특히 1932년 발표된 ‘가고파’는 김동진이 작곡하여 고향이 어디에 있건 향수에 젖어들면 누구나 부르곤 하는 국민 애창 가곡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지 81년만인 올해 허인구 마산역장은 문화적 관문으로 역의 분위기를 가꾸고자 하는 의욕에서 남마산로타리클럽과 힘을 모아 ‘가고파’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성지 마산을 부르짖는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시비 존폐문제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차제에 ‘가고파’ 시비 존립의견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갈등 종식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고 싶다.

첫째, ‘가고파’는 작가의 생애보다 작품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산의 관문인 마산역에 ‘가고파’ 시비를 세운 뜻은 정감 있고 아름다운 마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노산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국민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고, 미항마산의 모습을 잘 알릴 수 있는 시로 ‘가고파’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둘째, 노산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때 ‘친일혐의’ 운운 하면서 워낙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서 지금도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은상은 올려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타계한 노산의 일생을 살펴볼 때 일제통치 36년이 그대로 그의 생애를 관통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투사였다.

셋째 노산은 권력에 연연한 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산의 중요 프로필을 보면 대학교수, 언론사 간부, 문화단체 회장을 지낸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시조시인 협회장, 한국산악회 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예술원 회원, 이충무공 기념사업회 회장 등 정치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는 단체에서 봉사했다. 그가 권력에 집착했다면 장관이나 총리,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넷째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노산은 일제하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한일합방 때 여섯 살이었고, 광양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을 때가 마흔한 살이었다. 조국을 잃고 젊은 날을 보낸 그에게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산문, 그의 시조 편편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펼치며 문필생활을 영위했다. 그가 친정부적이었고 독재옹호에 기여했다는 비판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노산의 편에서 바라본다면 억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3·15에 대한 노산의 견해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마산 일부 시민단체가 노산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3·15에 대한 노산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다. 그 불만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1960년 4월 15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마산 사건의 수습책’이란 제목의 기사다. 여기에는 6개 항목의 설문에 대한 국가 원로들의 답변이 실려 있다. 이은상은 다른 원로들과 다른 태도에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다른 태도란 가장 적극적인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이다. 가령 어떤 원로는 답변을 회피했고, 어떤 원로는 극히 단순하게 답했다. 고향을 생각하는 노산은 사실상 정부의 총사퇴를 주장하면서도 고향 마산사람들에게 피해가 최소화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3·15가 민주주의 역사의 발자취로 인정받고 교과서에까지 기록된 지금 우리가 보는 3·15와는 다르게 그 당시의 혼란스런 정국 속에서의 노산의 심정을 배려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산은 조국과 고향 사랑의 마음을 가장 절실하게 시조의 가락에 담아낸 시인이라는 점이다. ‘가고파’, ‘가윗날에’, ‘옛동산에 올라’가 고향사랑의 노래라면 ‘길이 끝났네’, ‘고지가 바로 저긴데’, ‘기원’ 등은 조국사랑의 노래다. 수많은 강연과 산문 집필을 통해 청년들에게 국가관을 심어주었고 스스로 국토의 구석구석을 밟으며 노래로서 의미를 새겨 놓았다.

그러나 노산인들 한 인간으로서 어찌 결함이 없었겠는가. 우리가 지금 ‘가고파’ 시비를 지키려함은 완전한 노산의 생애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고향을 사랑하고 각박한 현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시정(詩情)에 젖어가며 오늘의 고달픔을 이겨나가자는 데 있다. 이런 소중한 의미라면 돌에도 마음에도 새겨 간직함이 옳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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