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생명 지하수 - 제1부 목마름 해결까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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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물허벅 시대


새벽부터 물허벅 진 아낙네 행렬

화산섬이라는 특이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제주도는 연평균 강수량이 많은 곳임에도 비가 오면 빗물이 한꺼번에 바다로 흘러가버리거나 땅으로 스며들어 지표수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 때문에 바닷가 또는 중산간 지역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는 도민의 귀중한 식수원이었으며, 취락도 수원을 따라 형성됐다.

용천수가 솟아나는 지점은 돌담 등으로 울타리를 쳐 우마(牛馬)의 진입을 막거나 바닷물의 침입을 방지했고, 식수용 물을 긷는 곳과 빨래하는 곳 등 용도를 구분해 사용했다.

도민의 삶에 물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물허벅은 제주를 대표하는 한 상징이었다.

물을 길어 오는 것은 여인의 몫이었다.

어둠이 걷히기 전인 이른 새벽부터 해안에는 용천수를 찾는 아낙네의 행렬이 이어졌다.

물동이로 물을 나를 때는 작은 허벅(항아리)을 물구덕(바구니)에 담아 짊어졌는데, 물구덕 밑에는 작은 대발이 붙어 있어 땅에 내려놓고 쉴 때 등에 있는 허벅의 물이 쏟아지지 않게 했다.

이는 돌멩이가 많은 비탈길을 이용해야 하고, 더구나 물이 귀한 상황에서 멀리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풀이된다.

바닷가 용출수의 경우 물때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먼 곳에 사는 아낙네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물을 얻는 데 바쳐야 했다.

물을 찾아 허벅을 메고 나서는 아낙네의 모습은 제주를 찾은 이방인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였지만 도민에게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고된 노동이었다.

70대 중반의 한 노인은 “물을 길어 오는데 왕복 30분은 보통이었다”며 “당시는 쉴 시간이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다”고 회고했다.
제주에서 물과 관련한 기록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저술을 통해 상세한 모습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1905년 제주를 방문한 일본인 아오야기 츠나타로오느는 ‘조선의 보고, 제주도’에서 영주10경과 함께 탐라8경을 소개했다.

이 탐라8경은 단순히 제주의 경치뿐 아니라 당시 도민의 삶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급수(汲水)도 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종신토록 괴로움을 당하는 건, 물 긷는 군인과 다름이 없다. 꼽추 같이 굽고 다녀야 하니 메추라기.고니 같이 관절이 괴롭다’고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일상을 토로했다.

이처럼 물을 얻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면서 수도를 건설하는 노력도 부단히 전개됐다.

도내에서 처음 간이수도가 시설된 때는 1927년 5월이다.

당시 일본인 사이고는 현재 정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천수를 자연유하식으로 송수해 서귀포시 일부 지역에서 이용했다.

처음 개인이 경영하던 이 수도는 1932년 행정에서 매입해 요금을 받고 공급했는데 집까지 수도를 끌어들였던 가구가 40가구였고, 나머지 3610가구에서는 11개의 공동전을 이용했다.

이와 함께 서호.호근 간이수도는 절곡지물을 수원으로 1927년 7월 완성됐고, 토평.하효.신효 간이수도는 ‘돈내코물’을 수원으로 1932년 7월 완성됐다.

제주도광역수자원관리본부의 고기원 박사는 “서호 간이수도의 경우 당초 흙을 구워 만든 토관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운반과정에서 많은 분량이 파손돼 곤란을 겪었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 서호동 출신의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철제 파이프를 구입해 와서 완성됐다”고 소개했다.

고 박사는 당시 수도는 고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공동수도를 통해 공급됐는데, 지금과 비교할 때 정수시설만 없는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간이수도는 일부 지역에 한정됐을 뿐 아니라 불어나는 물 수요에도 턱없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

빗물도 갈증 해소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봉천수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촘(아래아)항’을 이용해 빗물을 받아 사용했다.

촘(아래아)은 나무 밑둥 근처에 처녀의 땋은 머리처럼 띠를 엮어 묶어놓은 것을 말하는데, 정갈한 나무 잎사귀에 내린 빗물이 이 통로를 통해 밑에 받쳐놓은 항아리(촘항)에 저장된다.

남제주군 성산읍 수산리의 경우 1921년에 이미 개인탱크가 설치됐는데, 마을 안에 공동탱크를 마련하고 수목을 이용해 모은 빗물을 이 공동탱크에 저장해 건기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도 갈수기에는 4㎞ 떨어진 용천지대에서 음료수를 구해 와야 했다.

이처럼 섬사람들이 생명줄인 물을 얻기 위해 ‘물허벅’의 괴로운 행군을 끝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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