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곧 돌이고, 제주인은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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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자연을 이겨낸 제주인의 지혜
   
돌, 바람, 여자가 많다하여 삼다도로 불렸던 제주도에서 돌과 바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은 제주인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제주인들이 거주하는 집, 농사와 목축·어로생활을 영위하던 밭과 바다, 목장은 물론 무덤조차 돌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제주인의 삶이다.

말 그대로 화산섬인 제주에서의 생존은 곧 돌에서 태어나 돌에서 생활하다 죽으면 돌로 돌아가는 윤회의 삶이었다.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제주의 밭담을 포함한 올렛담과 잣담, 산담, 원담, 성담 등 제주의 돌담은 바람으로 대표되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는 제주인들이 모습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소중한 문화자원이다.

제주일보는 8회 기획으로 제주 돌담의 경관·문화적 가치를 조명해 문화유산으로서 제주 돌담의 보존방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제주 돌담의 시작=조선시대의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에 의하면 ‘제주도는 옛적엔 내밭 네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힘이 센 집에서 나날이 남의 것을 침범하므로 모든 힘없는 백성들이 괴로워하더니 김구(金坵)란 이가 판관이 되어 온 뒤에 백성들의 고통을 듣고 돌을 모아 밭에 담을 두르게 하니 경계가 분명해지고 그 뒤부터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지포(止浦) 김구(1211~1278년)는 고려 고종 21년(1234년)에 제주에 판관으로 부임했던 인물이다.

농업과 목축을 위해 이전부터 바람막이와 울타리의 기능을 하던 돌담이 김구 판관 이후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정리사업이 이뤄져 경계의 개념이 강화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제주 돌담의 기능과 길이=돌담으로 사유재산의 경계가 뚜렷해지고 바람을 효과적으로 막는 방풍막이 되어 농작물을 보호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생활에서 추위를 막아내기도 했다.

또 방목중인 말과 소가 무단으로 들어와 곡식을 먹는 피해를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제주 돌담의 길이에 대해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이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용어다. 이는 송성대 제주대 교수가 ‘제주인의 해민정신’이라는 책자를 통해 제주의 돌담을 ‘흑룡만리(黑龍萬里)’라 하여 총 연장이 9700리에 이른다고 표현한 것이 시초로 전해진다.

2007년 농림부에서 시행한 농림기술개발사업인 ‘제주도 농촌지역내 돌담 문화자원의 활용을 위한 농촌 경관보전 직불제 도입방안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제주도 돌담의 총길이는 3만6355㎞, 그 중 밭담의 길이는 2만210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단순히 지목이 밭으로 된 것을 조사한 것으로 지목이 임야나 대지를 제외한 수치다. 또 옛 목장의 경계인 잣담과 무덤의 울타리인 산담, 각종 성곽의 담들도 제외한 것으로 실제 길이는 이보다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돌담의 종류와 형태=제주 돌담은 위치와 용도에 따라 울담과 올렛담, 축담, 밭담, 원담, 산담, 잣담(잣성), 성담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울담과 축담, 올렛담은 집담의 형태로 울담은 집 울타리를, 축담은 집의 외벽을 이른다. 올렛담은 마을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 즉 골목길을 가리킨다.

밭담은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소와 말이 밭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거센 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 준다.

원담은 얕은 바닷가에 돌담을 길게 쌓아놓고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져 나갈 때 돌담에 걸려 자연스럽게 가두는 돌로 만든 그물이다. 이는 바다의 밭담으로 농부가 밭에서 곡식을 수확하듯이 어부가 원담에 가두어진 고기를 잡는 개념이다.

산담은 무덤 주위를 돌로 쌓은 담으로 무덤이 망자(亡者)의 집이라면 산담은 집 울타리 역할을 한다. 무덤이 위치한 중산간 대부분이 방목지대인 특성을 고려해 소나 말의 침입을 막고 산불이 무덤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구실도 했다.

잣담은 목축과 관련된 돌담으로 성이라기보다는 목장의 밭담에 가깝다. 도내 전역의 중산간에 원형으로 남아있는데 상잣, 중잣, 하잣 등 3단으로 나눠져 있다.

성담은 외침에 대비한 방어용으로 쌓은 것으로 조선시대 제주목이 위치했던 현재 제주시 중심가의 제주성과 정의현, 대정현에 있는 현성, 그리고 9개의 진에 위치한 진성이 있다.

또 고려시대부터 쌓은 것으로 제주 해안선을 돌아가며 쌓았던 환해장성과 제주4·3사건 당시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전략성도 곳곳에 남아있다.

현봉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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