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에 앞선 北 역대 '비운의 2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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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동생 김영주 실각 후 복귀해도 영향력 잃어

북한 3대 세습 체제의 출발점이었던 김일성 1인 지배 체제에서도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김일성 시대의 대표적인 2인자는 노동당 조직비서를 지낸 박금철과 김영주다.

 

광복 정국과 6·25전쟁을 거치며 소련파와 연안파를 숙청한 김일성 정권은 1961년 4차 당대회를 통해 항일 빨치산의 순결성을 내세우며 범항일세력을 중심으로 김일성 지배체제 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2인자 자리인 당중앙위 부위원장(조직비서)에 오른 박금철은 김일성 주석의 만주 항일빨치산과 자신이 활동했던 국내 갑산파를 구분하고, 자신이 속한 갑산파 세력이 노동당 혁명전통의 뿌리라고 치켜세우며 자신을 우상화하는 행보에 나섰다.

 

1인자를 밀어내려는 박금철의 이 같은 행보는 1967년 4기 1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계기로 철퇴를 맞았다. 박금철은 물론 갑산파 세력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지방으로 유배됐다.

 

이를 계기로 김 주석은 자신의 기반인 만주 항일빨치산 세력만으로 권력을 재편하고 당 조직비서에 친동생인 김영주를 앉혀 진정한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공식 서열 2위 인물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지만, 김 주석의 혈육이자 당 조직비서인 김영주의 세도를 앞지를 수는 없었다.

 

김일성 1인 지배가 지속하는 한 영원할 것 같았던 김영주의 권력도 1973년 김 주석의 후계자에 조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정되면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김영주는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일가족과 함께 북한에서도 오지인 자강도 강계로 사실상 유배됐고 측근 간부들도 전부 좌천됐다.

 

그 후 20년이 지난 1993년 사실상 김정일 1인 지배 체제가 공고화한 후에야 비로소 국가 부주석과 정치국 위원에 선출돼 정계에 복귀했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주의 정계 복귀는 '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힘과 세력을 모두 잃은 원로에 불과했다.

 

김영주의 사례는 국정원이 실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밝힌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재기하더라도 종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수령 유일체제인 북한 권력구조의 특성상 강력한 2인자는 존재 자체로 부담일 수 있다"라며 "지난 2년간은 김정은 체제의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에서 장성택이라는 2인자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김정은 친정체제 공고화에 초점이 맞춰지는 만큼 장성택이 실각 후 재기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역할과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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