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김구,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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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에이브러햄 링컨, 백범 김구, 그리고 체 게바라는 어딘가 닮은꼴이다.

노 당선자는 존경하는 인물로 링컨과 김구를 서슴없이 꼽는다. 그런 까닭에 닮아가는 인상마저 받는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와는 아무런 연은 없지만 닮은꼴의 파편은 찾을 수 있다.

보통청년 노 당선자는 1981년 민주화운동 관련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노 당선자는 이후 노동법률 상담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변신, 19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사망사건 때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1988년 총선에서 당선된 노 당선자는 5공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지만 14대 총선, 16대 총선에서는 낙선하는 등 제도권 정치에서 부침이 심했다.

지난해 4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12월 대선 가도에서 노 당선자는 하루 평균 도보거리 20㎞, 차량 이동 650~700㎞의 대장정을 헤쳐 나갔다.

노 당선자가 신정치 1번지 뉴햄프셔인 제주를 시작으로 해 광주, 부산 등 지방을 누비는 대장정에서 “새 대한민국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땀흘린 만큼 잘사는 나라,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위한 여정을 마치고 또 다른 대원정에 임하고 있다.
가난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더 라 세르나’가 체(che.단짝이라는 애칭) 게바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가 7개월간의 일정으로 라틴아메리카를 여행 중이던 1952년 3월 그의 나이 23세 때인 ‘추키카마타’에서였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진학해 급진적 학생운동에 가입하지 않은 채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살라르찰비리 근처에 있는 ‘추키카마타’(인디오 말로 붉은 산) 구리광산을 찾은 때이다.

체 게바라가 추키카마타에서 흥미를 가진 것은 구리를 생산해내는 정교하고 복잡한 공정의 기계장치보다는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노동력을 쉽사리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문화적.정치적 의식을 낮은 단계로 묶어버린 상황을 알아채게 된다.

정의로운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겠다던 젊은 이상주의자 체 게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다.

체 게바라는 그 후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하게 되고 아바나에 입성, 카스트로에 이어 쿠바 제2인자가 된다.

체 게바라가 공업장관 재직시 소련과의 무역협정으로 미국시장에 종속됐던 쿠바의 설탕산업을 다변화하는 데 성공한 후 공식적인 자리를 떠나 볼리비아에서 마지막 혁명을 시도하다 1967년 10월 볼리비아군에 생포돼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됐다.

그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났어도 세계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가진, 뜨거운 심장을 가진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백범 김구는 무릇 한 나라가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면 남(다른 민족)을 의뢰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낸다고 경고했다.

흑인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를 지상의 목표로 삼았던 링컨 미국 대통령과 김구, 체 게바라 이들 모두가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해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한 단계 높은 데로 끌어올린 불굴의 노력을 보여준 인간 정신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노 당선자가 스스로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 링컨을 설정한 것은 아마도 낮은 단계로 임하는 열정적인 그들의 삶을 사랑해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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