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로 본 1950~1960년대 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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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난 해소.수원지 오염 주요 이슈
중산간 마을 봉천수 말라 고생 심해

이 시기 도내에서는 만성적인 식수난 해소와 수원지의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 지역사회의 주요 이슈로 대두됐다.

▲만성적인 식수난=1950년대 제주일보에는 봉천수에 의존하던 중산간 주민들의 애환이 구구절절이 소개돼 당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1957년 3월 한경면 조수리 주민들은 심각한 절량난으로 인한 굶주림과 함께 마을에 있는 봉천수가 말라붙어 물을 얻기 위해 낙천리까지 가서 그 곳 봉천수를 배급받아 목을 축여야 했다.

더욱이 낙천리 봉천수도 바닥을 드러내 해안마을까지 물허벅 행렬이 늘어서는 지경에 다다른 절박한 실정이었다.

이 때문에 초등학생들은 등교 때 허리에 물병을 차고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병에 물을 담아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은 중산간 마을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제주시 회천동 주민들은 음료수 사정이 극히 나쁜 데도 이웃 봉개동까지는 간이수도가 개설됐지만 회천동만 제외돼 버림받고 있다며 1960년 9월 본사를 찾아와 간이수도 개설을 호소했다.

주민들은 식수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다른 마을로 이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식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끝내 회천동은 버려지게 될 것이라며 위기감을 표출했다.

식수난 해결을 위한 주위의 온정과 노력도 따랐다.

육군 제1훈련소 공병대는 1955년 8월 한림읍 협재리 주민들의 식수원이 해변에 위치해 만조시 조수가 음료수천까지 밀려오는 상황으로 곤란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 음료수천 인근의 재엄굴을 뚫어 주민의 음료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우도면 하우목동 청년들도 1958년 저수지를 축조해 식수난 해결에 앞장섰다.

▲수원지 보호=1950년대 산지천은 제주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급수원이었다.

그러나 인근에 건물들이 급증하고, 이로 인한 오물이 유입돼 시민의 보건위생을 위협했다.

이 건물들은 곧 철거됐으나 1957년 다시 즐비하게 건물이 들어서면서 당시 약 5000세대가 음용하는 산지천은 만조 때면 하천변의 오물이 음료수장을 넘나들고 주변 주민들의 분뇨까지 흘러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가락천의 경우는 구조상 물을 긷는 입구가 얕아 물을 길을 때면 수면에 닿을 정도로 발을 딛고 더러운 손까지 물 속에 집어넣는 바람에 손과 발에 묻었던 오물로 늘 물이 더럽혀지는 등 공동 우물의 비위생적인 관리가 도마에 올랐다.

이에 앞서 제주시 용담동에 위치한 선반내에는 1955년 무허가 가죽공장이 인근 상류에 들어섰는데, 이 공장에서 가축 피륙을 세척한 검붉은 물을 선반천으로 쏟아 부어 3000여 시민의 보건위생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한 독자는 세계보건일에 ‘건강은 깨끗한 물로부터’라는 구호 아래 성대한 기념식까지 열고 보건주간을 정해 물 소독 등 대대적인 공중위생관념 앙양을 전개하는 이때 악취가 풍기는 물을 우물에 쏟아 붓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며 당국의 대책을 촉구했다.

이 가죽공장은 얼마 후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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