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각(藏書閣)과 기록 보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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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선왕조는 기록문화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던 시기였다. 기록문화의 꽃, 의궤만 보아도 기록의 섬세함과 정교성 그리고 예술성을 함께 볼 수 있다. 이러한 왕실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보존하던 곳이 대표적으로 규장각(奎章閣)과 장서각(藏書閣)이다. 규장각은 1776년 정조대왕 즉위년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장서각은 1908년 고종황제가 궁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수집해 황실 도서관의 건립을 구상하고 청사진을 그렸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거쳐 1918년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건물을 짓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왕실의 귀중본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장서각이라는 현판을 내걸을 수 있었다.

1981년 장서각의 모든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12만여 책의 국가왕실 도서와 4만 3000여 책의 민간 사대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장서각은 국가 경영 자료 뿐 아니라 왕실의 생활과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는 더없이 진솔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선원록으로 대표되는 왕실족보는 장서각에만 있는 유일본이 대부분이며 낙선재본 고소설과 한글편지는 여성문학의 백미를 이룬다.

현재 장서각에는 크게 두 종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조선왕조의 각종 행사기록인 의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학서적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특히 색감도 찬란한 의궤 중 숙종임금과 인현왕후 민비의 가례(혼례) 반차도가 주목된다. 반차도란 행사를 치를 때 참석자들의 위계에 따라 정해진 자리를 표시한 그림으로, 왕실에서 행사가 있으면 미리 반차도를 그려 국왕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1613년 간행된 의학서적인 ‘동의보감’은 한국 의학사에 빛나는 명저이다. ‘동의보감’의 편찬자는 전설적 명의 허준이지만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책 간행 사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신분과 직업을 초월하는 인본정신과 박애사상, 나아가 위정자가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여민동락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되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특히 장서각에만 소장되어 있는 ‘동의보감’ 한글본의 존재는 이 책이 한문 지식인에 국한되지 않고 백성들을 폭넓게 시혜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장서각에서는 세계기록유산의 발굴과 신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왕실족보류, 종묘기록류, 군영등록류 등이다. 특히 군영등록류는 조선시대의 군사체계와 함께 사회 문화사를 대변하는 귀중본이다. 장서각 도서 가운데 군사관련 자료가 약 150여 종 700책 정도이며, 이 가운데 60종 555책이 군영등록이니 꽤 많은 분량이다. 특별히 왕실호위와 수도 경비를 담당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 자료가 집중돼 있다. 따라서 장서각 군영등록은 조선후기 군사문제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오군영 제도는 물론 당시 군인들의 생활모습이나 처우까지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선조들의 치밀하고 책임 있는 기록 보존 의식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앞으로 고문헌의 보존처리와 현대적 활용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이다. 아울러 다른 나라와 차별성을 가진 고품격의 전통문화 콘텐츠는 세계인을 감동시키면서 지속적으로 한류 3.0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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