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특화상가 등으로 변신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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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시장 포목상점가
1945년 해방 전후 제주시 남수각 하천 하류인 동문로터리 일대에 각종 채소와 식료품, 포목을 파는 노점 좌판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제주 최초의 상설시장이 생긴 것이다.

동문상설시장은 도내 전역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물류기지로 역할을 하다가 1953년부터 화재가 잇따라 발생해 목조 가건물이 잿더미가 됐다.

1962년 김영관 도지사가 부임하면서 동문시장주식회사가 발족돼 당시 1억환의 공사비를 투입해 제주 최초의 상업 건축물인 동문시장㈜이 탄생했다.

신축 당시 도내 상업시설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 동문시장㈜은 1층은 200여 개의 점포, 2층은 영화관인 동양극장이 들어섰다.

1층 점포는 양복·양장을 주로 취급하는 양품점과 한복·이불·수의(壽衣) 등을 취급하는 포목점이 주를 이뤘다.

소위 ‘멋쟁이’라고 불리는 도민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이곳에 들러 한복이나 양복·양장을 구입한 경험을 갖고 있을 만큼 도내 최대 쇼핑타운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시장이 신축되고 50년이 되는 지금에도 이곳에는 포목점들이 남아 제주 시장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한때 100여 곳에 육박하던 포목점들은 지금 현재 4분의 1인 25곳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상인들이 오랜 단골들과 호흡하며 장사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포목점이 30년 이상 영업을 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포목점은 계속 번성해 결혼을 앞둔 집안에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선물할 예단(혼수 예물로 보내는 비단)을 구입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

1965년부터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은 “처음 시장이 건립될 당시에는 베나 무명 등의 옷감과 한복, 수의는 물론 이불과 커튼 등을 모두 다뤘다”며 “혼수 예단으로 한 집안에서 적게는 10벌에서 많게는 20벌까지 한복을 만들고 이불을 만들어 간 후 혼례를 올렸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상인들은 2, 3일에 걸쳐 여객선과 기차를 번갈아 타서 서울 광장시장 도매 포목점을 찾아 원단을 구매하고 화물로 부친 뒤 일주일이 지나 산지부두에서 도착한 원단을 우마차에 싣고 와 장사를 했다.

지금은 원단 샘플을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SNS로 보고 전화나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등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영업방식도 많이 변화됐다.


동문시장 포목상가도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30년 이상 자리를 지켜 온 고령의 상인들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

7, 8년 전 재건축 논의가 활발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머니에 이어 2대째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욱 동문시장㈜ 대표이사는 “사회 분위기 변화와 포목업종의 침체로 전반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업종 변경 등을 통해 패션특화상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특히 예전에는 사업이 잘 되면서 가업 승계도 많이 이뤄졌지만 지금은 사양산업이라는 이유로 가업이 승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며 “시장 현대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급격한 변화를 주저하는 기존 상인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점 중에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행정에서 각종 지원책을 펴도 상인들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며 “서울 동대문시장처럼 패션특화시장으로 탈바꿈하듯 동문시장도 포목상가를 중심으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현봉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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