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돌소금' 의 역사가 오롯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돌소금' 의 역사가 오롯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신탐라순력도15-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제주시 중심지(관덕정)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한 애월읍 구엄리는 377세대에 951명(2013년 12월 말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설촌 유래는 역사적 기록이나 정확한 고증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1271~1273년) 토성을 쌓으면서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구전에 따라 마을 설촌은 지금으로부터 약 740여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의 옛 이름은 ‘엄쟁이’, ‘옛엄쟁이’로 불렸고, 탐라순력도와 고지도에는 ‘염장포’, ‘엄장’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1차산업 중심의 농어촌 마을로 대표적인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도내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오이 재배가 시작됐고, 한때는 제주도 전체 생산량의 70%가 수확되며 ‘오이 마을’로 명성을 얻었다.

오이 재배 보급이 확대되며 지금은 도내 생산량의 40%대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연간 3000t 이상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전국에서 아름다운 포구 100선에 선정된 마을 포구에는 주민들이 ‘소금빌레’라고 부르는 소금밭이 해안선을 따라 길이 500m, 폭 50m 내외로 조성됐다.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강려목사가 부임하면서 바닷물로 햇볕을 이용해 소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쳐 소금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주민들의 생업 터전이 되었다.

생산된 소금은 품질이 뛰어나 중산간 지역 주민들과 농산물을 교환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포구 암반지대(소금빌레)에서 생산된 소금의 양은 전성기에는 1년에 1만7280㎏ 규모였다. 문헌에 의하면 소금생산을 전문으로 했던 가구가 60여 호로 기록됐다.

돌소금 생산은 보통 3,4월과 7~10월에 이뤄졌고, 판매는 5,6월과 11,12월 사이에 이뤄졌다.

마을 소금밭은 공동소유가 아닌 개인소유로 한 가구가 소유한 면적은 약 66㎡~99㎡(20~30평) 규모였다.

이후 돌소금 생산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다른 지방에서 들어오는 소금이 늘면서 1950년대 자취를 감췄다.

1996년 옛 북제주군의 지원을 받아 명맥이 끊어진 돌소금 재현이 시도됐지만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일회성 사업으로 끝나고 말았다.

구엄리는 2009년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며 돌소금을 테마로 한 마을발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사업비 5억2500만원(국비 2억5000만원, 지방비 2억5000만원, 자부담 2500만원)을 투입해 종합안내소 기능의 어촌체험안내센터와 조형물, 안내판, 파고라 등이 조성됐고 돌염전 복원과 함께 체험시설 정비도 이뤄졌다.

2012년 9월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어항협회가 전국 어촌체험마을을 대상으로 공모한 경관특화 시범사업에 선정되면서 지난해에는 국비 1억3000만원을 지원받았다.

구엄리는 돌소금 미니(테마) 체험장과 방문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추가로 조성됐다.

송영민 어촌계장은 “돌소금은 일반소금에 비해 입자가 굵고 짠맛보다 단맛이 강한 특징을 보인다”며 “바닷물을 길어 올려 염분도 20%인 ‘곤물’을 만든 후 30일 정도의 증발 과정을 거쳐야 하고 작업 과정에 손이 많이 가는 힘든 작업이지만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을 복원해 후세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돌소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어촌계장은 “돌염전 복원 이후 돌소금 생산량은 2010년 30㎏에서 지난해에는 120㎏으로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라며 “100g당 1만원에 판매되고 있는데 일반소금보다 맛과 영양이 뛰어나 일본에서 전량 구매 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했다.
<김문기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