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섣부른 '개방정책'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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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1000여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 조병갑을 쫓아냈다. 갑오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다.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즉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기로 다짐했다. 같은 해 4월 27일에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도 농민군에게 함락되었다. 겁에 질린 조정은 청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청국과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였고, 승기를 잡은 일본은 경복궁까지 무력 점령했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일본군은 관군을 앞세워 농민군을 공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꺾이고 말았다.

1894년, 소위 ‘토벌작전’에 참가한 일본군은 2~5만명의 농민군을 처형했다. 농민군의 10분의 1쯤이 외국군대에게 목숨을 잃자, 농민군은 재기불능이 돼 버렸다.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타격을 받았다. 외세에 의존해 농민군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 4월 17일, 청일 양국은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청일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승전국 일본은 전쟁배상금으로 은화 2억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청나라에게서 받아냈다. 당시 일본의 수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를 군비 확장에 쓸어 넣은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농업기술이 점차 발달된 결과 농촌사회가 분화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토지가 대지주의 수중에 집중되어 사회가 불안해졌다는 말이다. 둘째, 전정(田政), 군정(軍政) 및 환곡(還穀) 등 수취체제에 모순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셋째, 19세기 이후 본격화된 세도정치로 인해 부패가 만연한 것도 이유라 한다.

내가 보기에는 더욱 중요한 문제도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 전라도의 경우, 농민의 처지는 더욱 열악했다. 그들은 국가재정의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됐다. 전라도는 양반들까지도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됐기 때문에 상하 계층 모두가 조정에 등을 돌리기 쉬웠다.

한 마디로, 동학농민운동을 촉발한 것은 조정의 무분별한 무역개방 조치였다. 고종과 그의 측근들이 주도한 ‘개화정책’이 화근이었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개화정책을 편 것은 옳았지만,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거듭된 재정 부족은 매번 증세 조치로 이어져, 농민들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농민군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외세는 정치적 주권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농민군은 ‘서울의 권귀(權貴)’와 ‘횡포한 지방 양반’ 모두를 적으로 간주했다. 기득권 세력을 농민들은 배신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농민의 생계를 위협하고, 남에게 주권을 팔아먹은 죄인이었다. 농민들의 현실인식은 날카로웠다.

무분별한 시장 개방은 늘 사회문제를 낳는다. 1997년의 외환위기도 외환시장을 함부로 개방해 각국의 투기자본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공산품수출을 늘리려고 농수산물 수입시장을 열어젖혔지만, 그 폐해가 심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자유무역협정(FTA)’들 또한 부작용의 염려가 있다. 빈사상태에 빠진 농촌은 물론, 도시의 중산층도 자칫 붕괴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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