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문화 꽃피운 기록유산의 마을 '대정읍 안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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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등 당대 학자들 거쳐간 대정현청 소재지
제주목사 오식(1370~1426)은 제주도의 관아가 북쪽에만 있어 한라산 남쪽에 사는 백성들이 왕래하는 데 불편을 겪음에 따라 산남지역에도 관아를 설치해 달라고 상소했다.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1416년(태종 16년) 제주에 3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 체제가 탄생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는 약 600년 동안 제주의 서남부 지역을 다스렸던 대정현 현청 소재지로 마을 설촌은 대정현 설치와 함께 하고 있다.

성안에 사는 백성이 늘면서 1580년대(선조 중엽) 동성리(東城里)와 서성리(西城里) 2개 마을로 나뉘었고, 1897년 동성리는 현재의 안성리(安城里)로 개명됐다.

1891년 안성리에서 인성리가 분리됐고, 1915년에는 구억리가 분리돼 나갔다. 2차례에 걸쳐 마을이 분리되면서 현재 143가구, 375명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마을이 됐다.

주민들은 주로 감귤과 감자·마늘을 재배하고 있으며, 소규모 농가에서 키위와 토마토 등 특용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예로부터 대정향교, 송죽서원, 대정서당 등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 잡았던 안성리가 지금도 주목을 받는 이유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서예는 물론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인 김정희는 55세가 되던 1840년부터 8년 3개월 동안 이 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유배기간에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국보 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다. 제주의 유생들에게는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적거지(사적 487호) 인근에 2010년 추사유물전시관이 들어서면서 그의 올곧은 삶의 궤적과 빛나는 업적을 볼 수 있게 됐다.

대학자이자 예술가를 기리기 위해 대정읍에선 지난해 ‘제12회 추사문화예술제’를 개최했다. 유배 행렬의 재현, 제주민요와 해녀춤 공연, 서예 백일장, 서각전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돼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이 마을에선 동계 정온(1569~1641) 선생도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에 연루돼 1614년부터 귀양살이를 한 그는 유생들에게 학문을, 백성들에게 예를 가르쳤다.

추사는 자신보다 약 200년을 앞서 유배를 왔던 그의 덕을 흠모해 유허비를 세워줄 것을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조에게 부탁했다.

1894년 대정현성 동문 밖에 세워졌던 ‘정온 유허비’는 1963년 보성초등학교로 옮겨졌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충신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학문과 충절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안성리는 값진 기록유산들을 잘 보존해 왔다. 2010년 국기기록원은 안성리를 전국에서 3번째, 제주에선 처음으로 ‘기록사랑마을’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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