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1922년까지 기록된 호적중초 기록의 '백미'
▲ 안성리 마을회관 2층에 설치된 기록사랑마을 전시관에 보관 중인 호적중초. 1843년 호적중초에는 추사 김정희에게 집을 제공했던 송계순과 강도순의 호구도 기재돼 있다. |
4·3당시 향사에 있던 고문서가 불태워질 것을 우려한 마을 유지들은 3개의 서통궤를 집으로 가져간 후 마루 널을 뜯어 몰래 숨겨두었다.
이처럼 소중하게 간직한 문서들은 오늘날 기록유산으로 남게 됐고, 안성리는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은 교지와 칙명, 관고첩 등 15점, 절목류 4점, 정간류 4점, 성책류 3점, 선생록 8점, 병서 5점, 호적류 53점, 경로회규약 1점, 토지문서 10점, 시집 필사본 8점, 축문 3점 등 모두 114점이다.
기록의 백미는 오늘날 주민등록부나 다름없는 36권의 ‘호적중초(戶籍中草)’다. 이 기록물은 1780년부터 1922년까지 142년 동안 단절 없이 이어졌다.
주민들의 신분 구별과 역(役) 및 공물(貢物)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
호주와 처는 나이·본관·4대조를 기재했고, 자녀는 직업과 나이를, 며느리는 성씨·나이·본관을 적어 놓았다. 노비는 본인은 물론 부모의 이름과 나이를 기재했고, 도망 사례도 적시했다.
기록사랑마을의 산파 역할을 한 임영일씨(78)는 “호적중초에는 사노·교노·관노 등 유달리 노비들이 많았고, 노비들 중에도 종이를 만들던 지장, 활을 제작하는 궁장 등 특수 직업인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783년의 호적중초를 보면 안성리 마을에는 8명의 유배인이 배정됐고, 이 중 한 명은 33세에 입도해서 76세까지 43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내기도 했다”며 당시 시대상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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