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생명 지하수 - 제1부 ④물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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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 수원' 물문제 해결 전기 마련

1960년대 가뭄으로 주민들 고통 심각
1969년 산천단에서 첫 수도 통수식
물허벅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심정굴착에 성공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잇따라 통수식을 갖고 물난리에서 해방된 감격을 맛봤다.

그러나 심정굴착에 의한 지하수 개발은 막대한 예산이 드는 데다 수원 확보가 제한된 사업이었다.

더욱이 1960년대 초반에 추진된 심정굴착사업은 거의 200고지 이하에 그쳐 그 이상 고지대의 지하수 개발에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상수도가 개발된 제주시지역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는 반면 시설은 뒤처지면서 물부족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우락기 교수가 제주를 답사하면서 파악한 물 이용 상황을 보면, 1964년 당시 도내에는 △용천수 456군데 △봉천수 374군데 △수원지 43군데 △심정 15군데로, 용천수와 봉천수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당시 간이상수도로 개발돼 이용된 용천수는 도내 31군데에 달했는데, 이들 용천수를 통한 1일 급수량은 9385㎥였다.

급수 인구는 14만3919명으로 당시 도 전체 인구가 31만8358명인 점을 감안하면 상수도 혜택을 받은 도민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주도광역수자원관리본부 고기원 박사에 따르면 당시 1인당 1일 급수량은 65ℓ로 오늘날 급수량의 5분의 1 수준에 그치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60년대 중반 제주를 강타한 극심한 가뭄은 지하수 개발로 그나마 한숨을 돌렸던 중산간 주민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1964년과 1965년 오랜 가뭄으로 봉천수와 심정수원까지 말라버려 중산간지대 급수 지원을 위해 군부대와 공무원들이 밤낮없이 급수작전에 매달렸다.

중산간 일부 지역 주민들은 자신의 마을은 물론 인근 마을 봉천수까지 말라버리자 한 허벅의 물을 얻기 위해 해안 마을까지 왕복 40리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한림읍 금악.상명.월림.명월 등의 농촌에서는 일손이 모자란 상황에서 극심한 가뭄이 겹치면서 마차로 실어오는 물 한 드럼에 100원을 주고 사들여 목을 축이기도 했다.

당시 제주시 상수도의 경우 물 40드럼에 6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 농촌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상수도가 깔려 있던 제주시 지역도 전도를 강타한 가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수원지 수위가 급속히 내려가면서 제주시내에서도 제한급수가 시작됐고, 급수시간도 하루 건너 4시간에서 2시간으로 단축되는 등 절수 위기에 내몰렸다.

공동급수전에는 새벽부터 허벅.양동이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시는 도두동의 ‘오래물’을 제2수원으로 하는 수도확장공사를 추진하는 한편 어승생의 물을 끌어들이는 방안 등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1967년 또다시 극심한 가뭄이 내습해 그해 겨울까지 중산간 2만여 주민들은 조상 전래의 봉천수마저 말라버린 상황에서 생업을 포기하고 물을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심정굴착사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등 중산간지역의 물문제가 해마다 되풀이되면서 제주도도 급수난 타개를 위해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도가 마련한 고지 수원 개발계획은 어승생.아흔아홉골.영실.성판악.발이악 등 5개 고지 수원에서 흘러내리는 풍수기 1일 5만t, 갈수기 1만3000t의 물을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도는 거미줄 같은 급수파이프를 매설해 중산간일대 식수난이 심각한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한편 수원 부족으로 제한급수가 빈번한 제주시지역에도 급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계획은 주민의 삶은 물론이고 5.16 이후 정부가 제주도 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광활한 중산간 지역 개발을 위해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967년 4월 20일 23만7000명의 도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140정보의 수리불안전답과 목장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어승생 용수시설공사와 성판악 간이급수시설 등 제주도수자원개발 기공식이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렸다.

공사를 시작한 지 2년6개월이 지난 1969년 10월 12일 가뭄때마다 기우제를 올리던 제주시 산천단에서 어승생수원의 첫 통수식이 거행됐다.

해마다 물 부족과 봉천수 사용으로 건강에 위협을 받던 중산간마을 주민의 숙원을 해결하고 중산간 개발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됨으로써 제주도에 가히 ‘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어승생수원 개발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도민의 물 문제는 이후 상수원 개발이 이어지고,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도 병행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와 함께 부녀자들의 고된 일과였던 물 긷는 일이 해소되면서 물허벅도 역사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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