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100년의 지배 사슬 끊은 마지막 전투 치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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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법환마을...전적 유적지 재조명한다
   
(사진) 법환 한치축제가 열렸던 당시에 범섬으로 피신한 목호 수뇌부를 격퇴하기 위해 출정한 최영 장군과 군사의 행렬을 재현한 모습.
서귀포시 대륜동 신시가지 남동쪽에 있는 법환마을은 몽골(원나라) 지배 100년의 마침표를 찍은 ‘범섬전투 전적지’가 남아 있다.

고려 말인 1374년(공민왕 23년) 최영 장군은 몽골의 잔존 세력인 목호(牧胡:말을 키우던 오랑캐)들이 전쟁에 패한 후 마지막 본거지로 범섬에 들어가자 이 섬을 포위해 수뇌부를 섬멸하고 승전했다.

마을에는 640년 전 고려군이 막사를 치고 주둔한 ‘막숙개’를 비롯해 성을 쌓았던 ‘군자왓’(軍城), 밧줄과 뗏목으로 범섬까지 다리처럼 연결한 ‘배염줄이’ 등 전쟁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전해지고 있다.

역사의 현장인 법환포구에서 2000년 제1회 ‘법환 한치축제’가 개최된 가운데 최영 장군의 목호 토벌 및 전승 재현, 수영대회, 한치낚시, 가요제 등이 열렸다. 하지만 예산 문제와 축제 통·폐합으로 2006년 제7회 축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법환마을은 1545년 현씨가 처음 정착한 이래 인구가 꾸준히 늘었다. 정의현지(旌義縣誌·1899년)에 따르면 당시 법환리는 123호에 808명이 거주했다. 지금은 1061가구에 2428명이 사는 비교적 큰 마을로 성장했다.
1960년까지 벼농사가 활발했으나 감귤이 도입되면서 논은 자취를 감췄다. 감귤농사가 확산되던 1970년대 초 마을 주민 허택선·한원효씨가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 시설하우스가 ‘붐’을 이뤘다.

1980년에 보급된 바나나는 마을에 부를 안겨줬다. 주민 135명이 작목반을 결성, 하우스 7만6000㎡(약 2만3000평)에서 바나나를 재배했고, 상자(12㎏) 당 6만원까지 오르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바나나 세 상자를 팔고 자식을 대학에 보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잘 나가던 바나나 농사는 1991년 수입 자유화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막차’에 올라 바나나에 손을 댔던 일부 주민들은 투자비는 고사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대체 작물로 알로에와 신선초를 키웠으나 점차 판로가 막히면서 농가의 시름은 깊어지게 됐다.

현재 대다수 농가들은 한라봉과 청견, 천혜향 등 만감류를 재배하며 과거의 위기를 극복해 냈다.

한편, 고려 말 군사 요충지이자 전적지인 법환마을은 ‘잠녀(해녀)마을’로 거듭났다. 2003년 ‘우리 문화·역사마을 조성사업’ 일환으로 법환포구에는 1.8m 높이의 전통 해녀상과 돌고래 조형물 등이 설치돼 해변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어 2009년 해녀체험장(해수풀장)이 문을 열었고, 범섬을 낀 해안가에는 올레 7코스가 개설돼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을의 숙원사업인 해안도로(2㎞) 공사가 최근 착공했고, 지난달 30일에는 범섬 앞 해안가에 ‘최영 장군 승전비’가 건립됐다.

내년에는 8년 동안 중단됐던 축제를 되살려 마을의 명성과 자랑을 이어가기로 했다.

제주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해 온 법환마을은 인문·자연·관광 등 무한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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