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뱀처럼 가난한 사람의 맨발부터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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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언론학 교수
학창시절, 국사수업에서 가장 알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는 의병에 관한 기록이었다. 임진왜란 의병기록은 지도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소상히 배웠다. 그뿐인가, 크고 작은 시험에 자랑스런 의병의 역사는 꼭 출제되었고 행주치마 유래까지 곁들인 역사 선생님의 자부심이 가득한 수업을 들으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커서 어른이 된 뒤 가진 의문은 병자호란 때에는 어찌하여 자랑스러운 의병의 역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의 의병의 활약사는 배운 기억이 많지 않다. 아니 나의 경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같은 의문은 책을 읽고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며 조금씩 풀려 나갔다. 임진왜란은 조선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알려진 대로 선조는 전쟁이 발발하자 의주로 도망간다. 조선의 정궁은 왜적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에 의해 불타는 치욕을 겪게 된다. 선조의 도망은 곧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도피하면서 사흘 뒤 평양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허언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당시 선조의 명나라 망명시도는 걸내부(乞內附) 파동으로 정의된다. 걸내부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속으로 들어붙기를 애걸한다는 의미다. 곧 자신과 비빈들만이 살기 위해 조선을 버리겠다는 것. 그러던 이 저열한 조선왕은 이내 왜적과 싸우기로 맘을 바꾼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이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명에 빌붙어 비빈들을 거느리며 제후로 살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내키지 않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류성룡은 노비들이 왜적의 수급을 가져 오면 양민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획기적인 면천법을 강행한다(선조 26년). 왜적 수급 하나면 양민으로 돌려준다는 데 의병을 마다할 노비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몇몇 개혁입법과 함께 수많은 조선 의병들을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노비제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들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런 개혁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임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같은 기대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고 자리가 어느 정도가 보전되자 생각이 달라진다.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육지전투의 영웅 의병장 김덕령을 역적모의했다며 혹독하게 고문해 죽인다. 이순신도 제거 대상. 선조는 "이순신은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6월 26일)고 비판했다.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 등 서인의 비판을 핑계로 이순신 제거에 나선다. 한달간 처절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목숨만 건져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이 와중에 원균이 1597년 한산도와 칠천도에서 거듭 대패해 수군은 궤멸되고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스스로 수군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하기까지 한다.

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는 대목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지루했던 전쟁은 끝났다. 수백만 백성의 죽음 위에 선조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왜적을 죽이면 양민으로 신분을 돌려주겠다는 면천법을 선조는 아예 없던 일로 해 버렸다. 이후 44년 만에 병자호란이 터졌다. 의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저버리고 저 혼자 살기 위해 의주까지 도망간 기득권 세력에 대해 민초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슬프게도 정의는 뱀처럼 가난한 사람의 맨발부터 문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계절은 어느 덧 여름의 끝이다. 이순신 영화가 화제라고 한다. 이 비운의 영웅을 생각하며 올 여름과 이제 이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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