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 허덕이던 제주인 살린 의로운 여인의 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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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기념물 제64호 김만덕 묘비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제주의 여성 의인(義人) 김만덕(金萬德·1739~1812)을 언급할 때 늘 뒤따르는 문구다.


김만덕은 조선시대 기아에 허덕이던 제주 백성을 구휼했던 거상(巨商)으로 사회 환원을 실천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典範)이자 여성 CEO의 롤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더군다나 김만덕은 신분(기생)과 성별(여성), 변방(제주) 출신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이 더욱 깊고 넓다.


제주시 사라봉 언저리의 모충사에 김만덕의 묘비가 있다. 1812년(순조 12) 마을주민들이 그녀의 공을 기려 세운 이 묘비는 2007년 1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됐다.


김만덕은 김응열(김해김씨)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2살 때 전염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에게 맡겨졌다가 퇴기 월중선의 수양딸로 보내졌다.


그녀는 잠시 관기로 지내다 곧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를 시작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794년(정조 19)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혹독한 기근에 시달리자 김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매입해 10분의 1은 친족과 자신의 사업기반이던 객주(여관)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구했다.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정조는 그의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고 교지를 내렸다.


김만덕은 “서울에 가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당시는 출륙금지령이 엄존하던 시대로 도서 출신 여성은 내륙으로 나갈 수 없고 육지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금지됐다.


정조는 한양으로 찾아온 김만덕을 의녀반수로 제수하고 궁에 살도록 했다.


김만덕이 소원대로 금강산 유람까지 마친 후 제주로 돌아올 때 영의정 채제공(1720~1799)은 ‘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1742~1801)은 시를 지어 그녀에게 건넸다.


특히 헌종 6년(1840)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을 전해 듣고 감동해 손수 ‘은광연세’를 써 양손 김종주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김만덕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제주도는 김만덕상을 제정해 매년 탐라문화제 일환으로 모충사에서 열리는 만덕제 때 시상하고 있다. 김만덕기념사업회는 김만덕의 정신을 계승해 ‘쌀 쌓기’ 행사 등을 통해 기부금을 거둔 후 베트남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자선사업을 펼치고 있다.
다음은 이가환이 김만덕에게 건넸던 시다.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인데/ 육십의 얼굴이지만 사십쯤으로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뵈었구려/ 다만 한번 금강산을 유람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산은 동북녘에 연기와 안개로 싸여있네/ 임금님이 끄덕이며 날쌘 역마를 내리셨으니/ 천리의 광휘가 강관을 떠들썩하게 하네/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는 마음과 눈은 장한데/ 표연히 손을 흔들면서 바다 구비 돌아가네/ 탐라는 먼 예로부터 고량부가 살던 곳인데/ 여자로서 이제 비로소 임금 계신 서울 구경하였네/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따옥새 떠나갈 듯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 여회청대(女懷淸臺)로 이름은 어찌 족히 몇이나 있으리.’


김현종 기자 taz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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