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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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추석이 지났다.

다행히 길은 그다지 막히지 않았고 날씨도 괜찮았다. 고향집은 여전했으나 부모님의 등은 조금 더 굽어져 있었다. 누렁이는 앞다리를 들어 반겨주었고 살이 오른 흰 토끼들은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빨간 눈으로 토끼장 밖의 웅성거림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난 봄 병아리였던 닭들은 어느새 중닭으로 자랐고 수탉은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을 건드릴까봐 부리부리한 눈으로 철망 앞에서 시위를 했다. 갓 낳은 따스한 달걀 하나를 손에 쥐어보고 싶었지만 수탉의 위세에 욕심을 접었다. 고향집에 오면 마치 순례를 하듯 하나하나 돌아보는 습관이 든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예년보다 일찍 추석이 찾아온 탓에 고추는 아직 반밖에 물들지 않았고 수수열매를 찾아왔던 새들은 양파 망이 씌워져 있는 걸 확인하자 치사하다고 지저귀며 다른 밭으로 날아갔다. 품종 개량을 한 것은 아닐텐데 들깨 줄기는 사람 키보다 컸다. 깨를 베고 옮겨서 털려면 꽤나 품이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쓰다듬고 담장을 따라 뻗어간 머루 줄기에 매달린 검은 머루 알을 지그시 눌러본 뒤 겨우 네 알밖에 열리지 않은 사과나무에 애틋한 눈길을 주었다.

집 뒤편 개울가에서 자라는 돌배나무는 이미 열매를 모두 떨어트린 채 잎이 말라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돌배를 줍다가 돌처럼 단단한 돌배에 머리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고향에서는 돌배를 맛이 몹시 시어서 심배라고 불렀다. 잘 익은 돌배라 하더라도 한 입 깨물면 그 신맛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래서인지 다른 산열매보다 인기가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와 돌배 술로 일약 주가가 치솟았다. 폭설이 내리는 길고 깊은 겨울밤, 구들장이 뜨끈뜨끈한 고향집 뒷방에 앉아 문 밖의 눈을 내다보며 마시는 돌배 술의 맛을 어디에다 비교하겠는가.

뿔뿔이 떨어져 사는 식구들이 먼 길을 달려와 모두 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간다. 성묘 가는 길이 어렸을 때만큼 멀고 규모가 크며 왁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옛 기억을 떠올리며 산길을 달린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 시절, 한 시간은 걸어야 되는 성묫길이었지만 사촌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코를 흘리며 악착 같이 걸었다. 성묘를 가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벌에 쏘이고 넘어지고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지면서도 조만간 입으로 들어올 음식들을 상상하며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 세월을 건너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자동차를 타고 10분 만에 산소에 도착한다. 그러나 사촌들은 없다. 어른이 된 사촌들은 묘소를 바꿔 자기의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딸들은 시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당연히 예전처럼 서로 음식을 먹으려고 산소를 뱅뱅 돌며 법석을 떨지도 않는다. 그 그림자만, 그 기억만 산소 주변에 맴돌 뿐이다.

추석의 밤을 밝히는 보름달을 쳐다보았다. 보름달이 떴음에도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사업에 실패했을까. 형제들과 대판 싸운 게 아직 풀리지 않았을까. 명절에 때맞춰 부부싸움을 했을까. 고향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 외국으로 여행을 간 것일까. 또 취업에 실패한 것일까. 결혼은 언제할 거냐는 친척들의 위로가 지겨워진 것일까. 이유도 가지가지일 테고 변명도 가지가지일 것이다. 세상사 그렇고 그렇지 않은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저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하루빨리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이번 추석의 소원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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