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 촛불행진, 반미인가 탈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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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은 당시 유엔을 좌지우지하던 미국의 의지와 주선에 의해 성립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4.19 때까지도 시위 군중이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을 부수었을 때 성조기가 나오자 그 흥분 속에서도 신주 모시듯 고이 모셨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때 공안 당국에 잡혀간 어느 역사학자에게 검사가 당신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고 물어서 민족주의라고 했더니 그 공안 검사 말하기를 민족주의는 반미주의요, 반미주의는 용공주의라고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런 대한민국에 감히 반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광주항쟁부터라고 할 수 있다.

6.25전쟁 때부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주한미군이 가졌는 데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성립을 저지하려는 시민항쟁을 계엄군이 무참하게 탄압한 사실이, 미국문화원에 불지르는 반미운동을 유발한 것이다. 1940년대 말 미국의 절대 권위와 뒷바라지로 성립된 대한민국에서 1980년에 감히 반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누가 뭐라 해도 역사는 역시 변하게 마련임을 실감하게 된다.

2002년 대한민국에서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었는 데도 그 운전병들은 한국 법정이 아닌 미군 법정에서 무죄로 평결돼 고스란히 귀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는 물론 해외의 한민족 사회에서까지 이루 셀 수 없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눈비를 맞으면서 추운 밤에도 거리에 나와 촛불시위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평범한 젊은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무등 태우고 그 작은 손에 촛불을 들려 행진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이 같은 일을 두고 국내외 언론들은 한결같이 반미시위라 했고 미국 언론과 국내의 이른바 보수언론들은 이 반미시위를 크게 우려하게 되었으며, 전에 없던 반미시위를 우려한 국내의 일각에서는 친미시위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고 무등 태운 어린이의 작은 손에 촛불이 들려 행진하는 일을 미국문화원에 불지른 것과 같은 반미행위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촛불행진은 반미시위라기보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어쩔 수 없었던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인들의 ‘탈미 의식의 표현’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촛불시위는 곧 민족적 자존심의 발로라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이 미국의 절대적 뒷바라지로 세워졌다는 점, 6.25전쟁 초기에 거의 멸망할 뻔했다가 미군 중심 유엔군의 참전으로 소생됐다는 점, 그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된 지금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점, 한국군의 작전권이 아직도 주한미군에 주어져 있는 점 등등으로 보아 대한민국은 분명 미국 의존 국가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특이한 일로 될만큼 미국 의존 상태였던 것이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분명 휴전선 이북 사람들은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적이었고 미국은 혈맹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동족상잔을 겪지 않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북녘 사람들은 동족이며, 미국은 영국.프랑스와 다름없는 하나의 타국일 뿐이다.

6.25 동족상잔을 경험한 인구보다 그렇지 않은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아진 지금의 탈미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먼저 미국을 다녀오던 전례가 청산되고, 미국에 가보지 않고 대통령이 되는 일도 이상하지 않게 되어간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잘 쓰던 말이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은 오게 마련이며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아무도 막지 못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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