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생명 지하수 - 제1부 ⑤지하수 개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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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굴착 25년 만에 '물의 혁명

어승생 수원지 개발 후에도 제한급수 빈발
1970년대 들어 지하수 개발 본격 착수
1985년부터 도내 상수도 보급률 99.9%


성판악 수원 등을 이용한 간이 수도가 설치되고 어승생 수원 개발을 통해 물의 혁명이 시도됐으나 물 문제는 녹록하지 않았다.

잘못된 시공과 관리 소홀 등이 겹치면서 시설된 상수도조차 사용하지 못해 또다시 봉천수에 의존하는 난센스가 되풀이되기 일쑤였다.

특히 바닥 함몰 등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던 어승생 저수지의 경우 정상 가동 후에도 송수관 누수 현상이 심각했는가 하면 가뭄 때면 저수량이 급감해 제한급수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어승생 수원 개발은 물의 혁명을 가져오는 전기가 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극심한 가뭄으로 봉천수까지 말라버린 중산간 주민들은 또다시 물을 찾아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고, 소방차 등을 동원한 급수작전이 전개됐다.

물 부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197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용천수 상수원 개발과 지하수 개발 사업이 병행됐다.

1971년 3월 30일 서귀포.중문.표선지역 27개 마을 10만명에게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강정천 개발공사가 착수됐다.

강정천 개발공사는 66㎞의 배수관을 통해 하루 3만t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할 계획으로 추진됐는데, 산남지역의 어승생 수자원 개발 공사로 비유되면서 또 하나의 물의 혁명으로 일컬어졌다.

1971년 4월 13일에는 외도천 수원 개발 공사가 시작됐다.

당시 제주시 상수도는 금산 수원지와 어승생 수원에서 공급됐으나 갈수기와 여름 성수기에는 물 부족으로 격일 급수나 시간제 급수가 빈번했다.

외도천 개발은 제주시내 생활용수에 대한 항구적 해결과 북제주군 인근 지역 농업용수 해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이 같은 수원 개발 공사만으로는 도내 전역의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아직도 급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산간 지역 주민의 생활용수는 물론 제주도 개발의 관건인 농업 및 공업 용수 확보도 절실한 현안이었다.

용수 개발을 위한 근본적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업진흥공사의 조사 결과 지하수가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물 문제 해결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도내에서 심정굴착에 의한 지하수 개발은 1961년 착수됐으나 상당한 지역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제주 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정부는 농업진흥공사에 지하수 개발사업을 적극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도로와 용수 개발이 전제돼야 제주 개발이 촉진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농업진흥공사는 1970년 2월 광역 지하수 조사사업의 명제를 내걸고 도내 600고지 이하 18만1000㏊를 대상으로 지표지질조사 및 물리탐사, 시추조사에 착수했다.

물론 도내 지하수 조사는 이전에도 국립지질조사소.건설부 등 많은 기관이 부분적으로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농진공은 이듬해 10월까지 1년8개월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수가 풍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농진공의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지금까지 하늘에만 의존해 온 농업용수나 생활용수 개발에 새로운 방향을 내세운 것으로, 도내 어느 지역에서나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고 가뭄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2년부터 생활 및 농업에 이용하기 위한 다목적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용천수 수원으로부터 급수가 불가능한 중산간 마을에도 상수도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961년 도내 상수도시설은 제주시와 서귀포시, 추자도 등 3개 지구에 불과했다.
급수 인구도 3만5860명으로, 전체 인구 28만1000명의 12.2%에 그쳤다.

이처럼 열악했던 급수 사정은 1983년 전체 인구 47만4000명 가운데 98.6%인 46만7700명이 생활용수를 공급받음으로써 상수도 보급률 전국 1위로 올라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1인당 하루 급수량은 160ℓ로, 현재의 절반 수준이었다.

1985년 도내 상수도 보급률이 99.9%에 달함으로써 생활용수 해결 단계에 도달하게 됐다.

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 지 3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마침내 물의 혁명이 실현된 것이다.

이후 중산간 개발과 생활수준 향상, 관광산업 발전, 농.축산 수요 증가 등의 영향으로 농업.생활.기타용수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급증했고,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이로 인해 식수난 해결과 농업.산업용수 확보 등을 위해 적극적인 개발이 지상과제였던 도민의 생명수는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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