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방아 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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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언론학 교수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유행가는 ‘물레방아 도는데’ 였다. 물론 유행가에 앞서 웬만한 동요는 취학 전에 이미 끝냈다. 그 때 배운 동요가 아직도 선명하다. 과꽃이 어떤 꽃인지도 모르면서 올해도 과꽃이 피었고 과꽃을 좋아한 누나는 꽃이 피면 아예 꽃밭에서 살았다며 목청껏 외쳤던 기억이 새록하다. 그뿐인가. 과꽃을 보면 누나 얼굴이 떠오르고 시집간 지 영영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난다는 구절에 어린 마음에도 숙연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동요는 딱 그 뿐이다. 초등 시절, 당시 폭풍같은 인기 속에 등장한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곧 나의 애창곡이 된다. 학교 오가는 길, 길옆 전파사도 종일 이 노래를 틀었다. 그러나 노래가 그다지 행복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학에 들어서다.

나와 같은 386 세대들의 고민은 이 땅의 노동운동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어깨를 짓누르던 노동현장의 질곡속에 이 노래가 만만치 않음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1972년 발표된 노래는 창작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농(離農)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개발연대 한국인들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비애를 형상화한 노래로 이해된다. 등 떠밀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통해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사무침을 달랬다.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 다 가도록 소식이 없는…’. 떠난 이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너무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깊은 노스탤지어를 노래를 통해 달랬던 것이다. 꺾기로 불리는 창법도 창법이지만 노래는 넘 슬퍼 결국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그래서 가난했던 그 시절 한국인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 설 때 손을 흔들며 떠난 십대 소년소녀들은 ‘공순이’나 ‘식모'로, 또는 ‘공돌이’로 불렸고 그들이 둥지를 튼 곳은 구로공단이다.

‘공순이’는 특히 서러웠다. 가난해 못 배웠으니 당연히 무식했다. 특히 어린 소녀들은 대부분 남동생이나 오빠 학비를 벌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밀려 떠난다. 속옷에 작은 돈주머니를 달아주던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온 그들이다. 그래서 1970년대의 여공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영어로 된 라벨을 다는 것은 한글도 모르는 소녀들에게는 고역이었고 M과 W를 혼동해 작업반장에게 따귀를 맞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런 구로공단이 ‘최첨단 디지털단지’로 변했다. 봉제, 가발산업이 저문 빈자리엔 화려한 쇼핑몰이 들어섰다. 올해는 구로공단 조성 50년. 이를 기념한 ‘공단 노동자 체험관’이 문을 열었다. 체험관은 벌집으로 불리던 여공들의 주거공간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작은 방, 수십명이 살지만 사춘기 소녀들이 아침마다 긴 줄을 서야 했던 딱 한 개뿐인 푸세식 화장실 모습에 가슴이 짠해 온다. 그래서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는 지난 산업화 시대에는 국민가요처럼 불려졌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일진대 산업화 측면에서 가장 도드라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업화의 진정한 주역은 그 시절의 공화국을 담당했던 정치인도, 경제정책 입안자도, 몇몇 이름난 민주화 운동가도 아니다. 인간에게 배고픔만큼 잊혀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대물림 가난이 싫어 정든 고향을 떠나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 아래 꽃다운 젊음을 바친 이 땅의 노동자들이야말로 산업화의 빛나는 주인공이 아닐까. 왔다고 느낄 때쯤이면 저만치 떠나는 가을, 구로공단 50주년에 바치는 나의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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