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언론학 교수
문제는 이 같은 저작권을 침해한 베끼기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표절에 아예 눈감고 있다. 결국 중국 법원에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지만 실질적인 승소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6년 이래 한국저작권위원회가 베이징에 사무소를 열고 보호활동을 하고 있지만 안하무인격인 중국의 태도에 존재감조차 찾기 어렵다.
나는 오늘날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가치 못지 않게,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가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관점에서 서양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이다 보니 동양의 무위자연적인 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월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The Sound of Fury) 의 난해함 보다는, 양귀비를 잃은 당 현종이 베개닛을 적시며 연리지정(連理枝情)을 노래한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솔직히 햄버거보다 중국집 짜장면에 훨씬 더 정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근래 행태를 보면 문득 나의 이 같은 호의가 빛바래져 감을 느낀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중국인은 예로부터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자 유일한 문명국가로, 자신들의 황제가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어왔다. 2000년 전 통일 진나라 이래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선린 관계를 유지해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발적인 복속·굴종이 아니면 창칼을 앞세운 무력 정복을 통해 자신들의 발밑에 꿇게 해왔다. 이것이 중화주의의 요체다.
그런 중국이 긴 침체기를 끝내고 두려울 만큼 굴기하고 있다. 중국 스스로도 이제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이 곳곳에 넘쳐 보인다. 명동거리를 찾는 중국 관광객의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큰소리도 떠들며 두툼한 지갑을 여는 그들의 표정에는 이미 한국을 깔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제 온갖 짝퉁 콘텐츠나 불량식품을 쏟아내더라도 문제 삼기가 어렵다. 연전에 베이징의 자금성 내 스타벅스 매점이 고궁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는 글이 블로그에 등장한지 몇 달 만에 쫓겨났다. 합법적인 계약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고궁점 폐점에 대해 중국인들은 ‘스타벅스 구축(驅逐·쫓아냄)’이라는 황당한 표현을 사용하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나이키, 구글 등등 초대형 기업들도 힘세진 중국 앞에 양들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중국이 강대국으로 굴기하는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믿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콤플렉스에 가득찬, 이 무례한 대국이 마뜩찮은 것이다. 오랫동안 동쪽 오랑캐(東夷) 취급받으며 온갖 시달림 속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온 한반도 작은 나라에 사는 나는 거만한 이웃의 등장에 적잖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알아야 한다. 많은 세계인들이 중국을 겁내고 있긴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냉엄한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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