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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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어느 해 가을 잣나무 숲을 지나간 적이 있다. 청설모 한 마리가 잣나무 우듬지를 바삐 오가며 잣송이를 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보통의 경우 청설모는 잣 한 송이를 따면 입에 물고 나무를 내려와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행동을 반복하는데 이 녀석은 다른 방법으로 잣을 따고 있었다. 잣을 따서 나무 아래로 떨어뜨린 뒤 어느 정도 양이 쌓이면 내려와 옮기는 방식이었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다른 누군가에게 도둑맞을 위험이 다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술안주로 잣을 좋아하는 나는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녀석이 딴 잣을 담기 시작했다. 녀석은 뭐라고 한참을 씩씩거리다 다른 나무로 옮겨갔다.

또 어느 해 가을에는 고향 친구들과 산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어느 수컷 다람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다람쥐는 바람기가 많았는데,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에는 아름다운 첩을 서넛이나 두고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닥쳐오면 모두 정리하고 딱 한 명만 남겨둔다고 한다. 그것도 애꾸눈인 다람쥐를. 당연히 왜냐고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눈이 애꾸면 한겨울의 굴속에서 잣이나 도토리를 반밖에 먹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음…….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다. 올해 역시 많은 일들이 가깝고 먼 곳에서 벌어졌다. 누가 올 한 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나는 이렇게 쓸 것 같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이것은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이라크와 이란의 박해를 받으며 양국의 국경에 사는 평범한 쿠르드인들에 관한 슬픈 이야기다. 소년 가장이 된 주인공이 하는 일은 유일한 생존수단인, 국경을 몰래 오가며 밀수를 하는 것이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워낙 추운 지역이라 눈으로 덮인 국경을 넘으려면 말(馬)에게 독한 술을 먹여야만 되어서 붙여진 제목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이 내게는 말(言)로 여겨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마치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고, 달려가고, 몰려오고, 쓰러지는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더 나아가 취한 배에, 취한 기차에, 취한 그 무엇에 실려 눈보라 일렁이는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영화 속 일찍 가장이 된 어린 주인공도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은 채 영화는 끝이 났다. 정녕 그래야만 되는가…….

그런데… 지금껏 나는 취한 말들의 공격만 받으며 살았던 걸까. 나 역시 나보다 약해보이는 누군가에게 취한 말들을 던져온 것은 아닐까. 그 말에 누군가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아파했던 것은 아닌가. 다른 이들이 던진 취한 말에는 온갖 괴로운 표정과 신음을 토해 놓곤 내가 던진 취한 말엔 대수롭지 않은 척 등을 돌려버렸던 건 아닐까. 내가 던진 말은 절대 취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고 고집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으니. 취한 말뿐만이 아니라 취한 행동까지 저질러놓곤 억지로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해 가을 나는 잣나무 우듬지의 청설모를 계속 따라갔다. 녀석이 떨어뜨리는 잣송이를 빠짐없이 비닐봉지에 담으며. 나무 위에서 방방 뛰며 고함을 치는 청설모에 대해 재밌어 하며. 녀석이 견뎌야 할 길고 깊은 겨울은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렇게 낄낄거리다가 제법 묵직해진 봉지를 든 채 잣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술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 청설모 얘기를 들려주며 재밌지 않느냐고 낄낄거렸다.

그들은 슬픈 눈으로 저 위의 다람쥐를 보듯 취한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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