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쟁 와중에 초대 도의회 개원...명암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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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실시
   
지방자치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첫 제주도의회의원 선거는 1952년 5월 10일 실시돼 당선자 20명을 선출했고,열흘 후 초대 도의회 개원식으로 이어졌다.
지방자치는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지방자치법 제정으로 근거를 갖췄으나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직후여서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지방자치 실시를 미뤘다.

그러다가 오히려 국가가 전란에 빠진 1952년 봄 전격적으로 지방자치가 이뤄졌다.

전쟁으로 인한 미수복 지역인 한강 이북 지역과 서울·경기·강원·, 빨치산이 활동 중인 지리산 일대의 전북 남원군 등 4개 군을 제외한 채 나머지 7개도에서만 실시된 첫 지방자치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원하는 이 대통령이 국회 내에서 다수 세력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지방 차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 중임에도 지방자치제를 서둘러 도입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를 통해 전국의 도·시·읍·면 의회를 장악하고 지방의회를 내세워 국회 해산 압력을 가하는 등 지방자치를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초기 지방자치는 의사당은 물론 의회 업무를 지원할 의회 사무국도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한데다 자치 의식과 민주주의 경험 부족, 권한 남용으로 인한 의회 만능주의 등 시행착오도 빈번했다.

이처럼 지방 자치가 정략적 차원에서 시작됐고 환경조차 열악했지만 도민들은 대의기관인 의회를 구성하고 도민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민권 의식을 높이고 자치 역량을 축적해 가는 민주주의 교육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 이를 통해 제주도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감으로써 자주·자립 의식을 높이고자 했으며, 제주의 이익에 반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지방의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부는 1952년 5월부터 1961년 5월까지 9년1개월간 존속해 온 지방의회를 해산함으로써 막 꽃을 피우려던 주민 참여 민주주의를 꺾고 일방통행으로 질주했다.

이로 인해 1991년 지방자치가 부활하기까지 참여의 지방정치 토대는 뿌리째 뽑혀 나가 중앙정부의 움직임에 따라 제주도정의 방향이 결정되는 등 중앙정치 예속화가 심화되면서 지방자치는 30년간이나 암흑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제주의 첫 지방선거>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제주도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된 20명(북제주군 13명, 남제주군 7명)의 제주도의원들은 5월 20일 제주읍 삼도리 1177번지 세계고무공업주식회사 내 임시 회의장에서 제주도의회 개원식을 갖고 지방자치 출범을 선언했다.

초대 도의원은 김도준, 강재량, 김선희(26·최연소), 김영희, 전인홍, 김영린, 한행석, 김영진, 고인도, 차명택, 김대원, 장용직, 김상흡(이상 북제주군), 송방식(4091표·최다 득표), 허만필, 김옥현, 강성건, 김찬익, 강영술(62·최연장자), 현만경(이상 남제주군) 등 20명이다.
의장에는 전인홍, 부의장에 강성건이 선출됐다.

모두 56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초대 도의원 선거에서는 한라산 공비 소탕, 전기·상수도 및 교육시설의 확충, 상이군경과 영세민 생활 보호, 면 단위 의료기관 설치 등이 주요 공약으로 제시됐다.

선거운동은 기호가 적힌 명함을 돌리거나 사랑방 좌담회 형식의 개인연설회, 합동정견회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제주읍 합동연설회에는 수천 명이 운집했지만 과열·혼탁 양상은 없었다.

초대 도의원 선거 때는 주민들의 참정 의식이 낮을 때여서 당시 최승만 지사와 박명도 제주도선거위원장 등이 담화를 발표하는 등 선거 참여와 공명선거를 강조하는 계몽운동도 활발했다.

그 내용을 보면 ‘혈연과 지연을 떠나 선거권을 올바르게 행사하자, 기권하지 말자, 질서 정연하게 투표하자, 능력 있는 대변자를 선출하자,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원을 많이 뽑자’ 등이었다.

도내에서는 유권자 11만7078명 가운데 9만9917명이 투표에 참여해 85%의 투표율을 기록함으로써 전국 평균 81%를 넘어섰고, 충북(86%)·전남(86%)에 이어 전국에서도 3번째로 높았다.

선거 결과 당선자 구도는 자유당 7명, 국민회 3명, 대한청년당 4명, 무소속이 6명으로 자유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지만 친여계가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이 같은 구성 비율은 곧바로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 도의회는 개원 직후인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원하기 위해 국회 해산 건의안을 채택하는 등 여당인 자유당의 ‘전위부대’임을 자처했다.

<초대 도의회의 활동>
전시에다 4·3이 진행 중이던 시대에 출범한 초대 제주도의회는 한라산 빨치산 소탕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아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재산 공비 하산 권고문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도의회는 3억7000만원을 도민 부담으로 편성해 경찰측에 지원하기도 했다.

또 일제의 적산인 제주주정공장이 도내 국세 총액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대기업이었음에도 도민 재산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개인에게 불하된 경위와 의혹을 제기, 도민들의 관심을 모았으나 결국 도민 재산으로 환원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도내 농가의 주요 수입원인 고구마 수매가격 유지와 고구마 농가에 타격을 주는 주정공장의 당밀 수입문제를 공론화했으며, 태풍 피해에 따른 이재민 구호대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도립제주대학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민에게 2억5000만원을 분담하는 것을 의결했으며, 도립병원을 직영화하고 제주읍의 시 승격을 추진하는 데도 앞장섰다.

아울러 경북지역 등 외지로 출가한 제주 해녀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한편 양곡이 떨어진 농가에 대한 구호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시찰에 나서는 등 민의의 대변자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이 같은 현장 방문을 통해 실태를 농가의 실태를 파악한 후 태풍 피해 등으로 거의 매년 발생하는 절량농가에 대한 대책을 도의회 차원에서 수립하는 한편 중앙정부에 구호곡 배정 등을 적극 건의함으로써 도민들의 보릿고개를 넘기는데 힘을 모았다.

이와 함께 인민군 출신을 도립병원 과장으로 채용한 길성운 제주도 총무국장과 감정적인 시비가 붙어 파면 건의안을 채택, 파문이 일기도 했으며 김창욱 제주지검장이 이재민 집단촌인 법호촌 건설(서귀포 선돌과 제주시 산천단, 건입리) 문제로 공방전을 벌이다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한편 초대 도의회는 저학력으로 인한 전문성 부족과 의회 사무국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하면서 집행기관의 독주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도의회의 역할과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히 당리당략에 의해 중앙 정치에 휩쓸리는 상황을 초래하는 등 한계를 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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