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2년 연속 흉년에 대기근...식량 가격 폭등에 두 번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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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57년 10년 만의 제주도제 폐지 위기에 도민 반발…송당에 국립 목장 개발
   
▲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5월 23일과 12월 6일 송당목장을 시찰한 가운데 길성운 제주도지사가 흰 중절모를 쓴 이 대통령을 안내하는 모습.<자료 제공=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제 폐지 반발

광복 이듬해인 1946년 8월 1일 제주는 전라남도 관할에서 분리돼 역사적인 도제(道制) 실시의 기쁨을 누렸지만 1956년 도제 폐지 위기에 봉착했다.

8월 6일 정부의 기구 간소화 방안으로 제주도제를 폐지하고 전남에 예속시키는 예속안이 여당인 자유당 원내 정책위원회에 회부, 국회로 넘겨졌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8월 9일 도제 폐지 반대추진위원회(위원장 박치순)를 구성, 진정단과 시위단을 중앙에 파견하는 한편 이틀 후 도제 폐지 반대 제주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결사 반대를 선언했다.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8월 12일자에 ‘도민 5000여 명의 절규, 폐도안 반대 궐기대회’ ‘끝까지 관철하리!’ 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도민들은 이 선언문을 통해 “도제 폐지는 본도의 역사성과 지정학적 위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세계적인 행정선례에 역행하는 것이며, 해양주권선의 포기를 의미한다”며 “장래의 우리 국운을 좌우할 도제 폐지를 반대하는 것이 협소한 배타적 감정이나 눈 앞의 이해에만 구애된 일시적 흥분이 아님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도민 반발이 거세지자 자유당은 8월 24일 원내 정책위원회에서 제주도제 존속안을 통과, 도제 폐지 문제는 일단락됐다.

한편 같은 해 7월 5일 서귀·한림·대정면의 읍 승격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또 한림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판포리를 경계로 하는 한경면의 분면안도 가결됐다.

7월 28일에는 제주사범학교가 국립으로 승격됐다.

9월 3일에는 제2대 제주도의회가 개원했다. 도의회는 당시 관덕정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2대 도의원 선거는 의원 정수 15명 모두를 자유당이 싹쓸이했다.

의장에는 강재량이 선출됐다.12월 4일에는 제주도의회가 제주농고를 제주대학에 편입시키는 안을 통과시켰다.

▲흉년과 대기근

1956년에 이어 1957년 제주도는 전 지역이 극심한 보릿고개로 기근에 시달렸다.

제주신보(현 제주일보)는 1956년 5월 19일자 보도를 통해 ‘이번 봄은 유달리 양식이 떨어진 절량(絶糧) 실정이 심각했다. 5월에는 농가 호수의 50%에 해당하는 2만3071호가 절량됐다는 조사집계가 확인됐다’고 전했다.

같은 해 9월 9일에는 제주도를 덮친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절량 농가가 발생, 다음해 6월까지 구호 양곡 4만5200여 석이 필요하자 제주도 당국은 긴급히 중앙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제주신보는 1957년 2월 21일자 보도를 통해 제주도의회가 길성운 제주도지사와 김익중 산업국장을 출석시킨 가운데 춘궁기 식량 대책에 대해 추궁하는 상황을 소개했다. 이 때 제주도에는 연속 흉년으로 보릿고개를 앞두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태였다. 이날 길 지사는 도의회에서 현재 부족한 식량은 4만500여 석에 이르고, 당장 구호해야 할 도민은 3만5000여 명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에 굶주린 제주도민은 가축 사료인 밀기울로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밀기울을 부산에서 반입하는 가격이 가마당 200환에 불과했던 것이 600환에서 800환으로 폭등했다.
여기에는 일부 악덕상인들의 농간도 작용, 절량 농가들을 울렸다.

곡물값도 폭등해 쌀은 4승(升) 당 1500환, 좁쌀은 1300환, 보리쌀은 1050환이라도 구하기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제주 출신 김두진 국회의원은 대정부 질의에서 제주의 절량 실태를 밝히고 정부의 구호 대책을 따졌다. 이에 국회에서도 1957년 3월 16일 농림분과위원장을 단장으로 13명이 내도해 현지 조사를 벌였다. 3월 19일 조사단은 농림부장관에게 절량 농가에 대여곡 1만8000석을 긴급히 방출하도록 요구했다.

제주도는 3월 1일부터 4월 20일까지 양곡 3만6000석을 방출했고, 농림부는 5월 7일 4·5월분 구호곡 2만1886석을 방출하도록 지시했다.

1957년 12월 말에도 총농가호수 4만6505호 중 13%에 해당되는 5949호 2만8580여 명이 절량 상태에 놓여 조속한 구호가 요청됐다.

▲ 송당목장 준공

1957년 4월 15일 농림부는 국립 제주도 송당목장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목장 규모는 3000정보(2975만2200㎡)로 목장도로 15㎞와 목책 45㎞를 설치하고 축사 105동, 관사 8동 건설 계획이 발표됐다. 목장 관사는 대통령 전용 특호 관사 1동과 귀빈용 갑호 관사 2동, 을호 관사 1동이 포함됐다.

정부는 송당목장 조성사업비로 1억5000만환을 예산에 계상했다.

제주신보는 5월 24일자에서 ‘이 대통령, 5회째의 본도 내방’ 제하로 이승만 대통령의 송당목장 시찰 사실을 보도했다. 이 대통령은 5월 23일 송당목장에서 정재설 농림부장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귀한 땅을 개발하면서 조금이라도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옛날의 축산방식을 탈피해 새로운 방안을 연구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3월 28일 한미재단 고문인 밴플리트 장군이 와서 목장 후보지로 안덕면 서광리, 한림읍 금악리, 구좌면 송당리를 3일 동안 돌아보고 송당리지역을 지정하고 귀경했다.

송당목장 일대는 마을공동목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공유지는 오름 하나뿐이고 대부분 개인 소유지였다. 정부는 개인 소유지에 대해 무상 임대 조건으로 확보하도록 제주도에 지시했다. 이에 길성운 도지사는 정책 사업과 지역 발전을 이유로 내세워 설득에 나섰다. 일부 지주들은 무상 임대에 반발해 토지 임대를 거부하기도 했다. 길 지사는 공무원과 지역 유지들을 동원해 반강제적으로 토지를 확보했고, 조건은 우선 무상 임대했다가 소정기한이 지나면 계약을 경신해 임대료를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그 해 8월 9일에는 미국산 육우 브라만 160두가 처음으로 성산포항으로 들어왔다. 같은 해 9월에는 면양과 산양 148마리, 12월에는 소 200두가 추가로 도입됐다.

10월 31일 목장 시설이 완공됐고, 목장의 명칭은 11월 9일 국립제주목장으로 바뀌었다.

12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완공된 송당목장을 시찰한 후 이튿날 제주시 관덕정 앞 시민환영대회에 참석, “내가 제주도를 잘 사는 지역으로 만들려는 것은 산과 바다에 많은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많은 예산을 들여 미국의 기술과 원조를 받고 송당을 훌륭한 목장으로 만들기 위해 소와 염소 600마리를 수입하고 있다. 송당목장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범 기자 kimjb@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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